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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죄값은 치러야 합니다

덕정교회 2024. 4. 12. 21:12

죄값은 치러야 합니다

(삼하 12:10~11, p.479, 51:10~12, 375, 379)

 

우선 다윗의 신상을 살펴보면 아버지 이새의 아들 가운데 여덟째 막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사울 왕을 이어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기까지 여러 가지로 지도자로서 잘 준비되고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며 인정해 주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에게 복을 주심으로 이웃 나라들과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국토를 넓혀갔습니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뜻밖의 중대한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자신의 충신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 싸우고 있는 사이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동침하고 임신을 하자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아를 청부 살인한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징벌을 선포하신 말씀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떻게 이런 큰 죄악에 빠져들었는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교훈을 몇 가지로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풍요에 안주할 때 범죄의 빌미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삼하 111절 말씀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이와 같이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출전할 때가 되었지만 부하들에게 미루고 자기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윗이 출전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배경으로는 왕권의 안정과 물질적 풍요를 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이나 권력도 안정과 풍요에 안주하면 범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어느 때보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풍족함을 누리게 될 때가 범죄의 싹을 경계할 시기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범죄의 환경에 노출됩니다.

삼하 112절 말씀입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은 한가로이 낮잠이나 즐기며 오후 시간 왕궁 옥상에 올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죄의 세력에게 마음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부하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있어야 할 판인데, 왕궁에 머물며 낮잠을 자고 있었듯이 오늘 우리도 영적 전투를 의식하지 못하고 영적 잠을 즐긴다면 사탄(마귀)의 밥이 됩니다.

우리는 항상 근신하며 깨어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벧전 57~8 말씀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근신하라는 뜻은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간을 조절해야 하고, 마음을 조절해야 하고, 감정을 조절해야 하고, 돈을 조절해야 하고, 육체를 조절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교우 여러분, 언어에 다이어트를 하십시오. 문화생활에 다이어트를 하십시오. 세속적인 욕망과 꿈에 대해 다이어트를 하십시오. 육신 중심, 현세 중심한 생활에 다이어트를 하십시오.

이렇게 육신의 생활에 다이어트를 하면서, 영적인 생활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영혼의 안테나를 세워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추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생활, 말씀 묵상 생활, 예배 생활, 봉사 생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는 날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삽니다. 복잡한 내장기관을 버렸고 오줌보를 버렸습니다. 심지어 뼛속까지 비워버렸습니다. 대신 날 수 있도록 팔을 단련시켰습니다. 수십 킬로 수만 킬로미터를 저어가도 힘들지 않도록 팔 근육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람을 타고 창공을 누비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귀의 함정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천국 문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려면, 새처럼 나의 욕망을 비우고 버려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작은 죄악을 감추려 들면 더 큰 죄악에 빠져듭니다.

삼하 1114-15절 말씀입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를 온갖 꾀로 덮으려다가 급기야는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그의 손에 들려 요압 장군에게 전달시키는 파렴치한 죄악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안목의 정욕에서 간통으로 그리고 살인으로까지 죄악은 눈덩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가중되어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속성을 깨우치게 됩니다. 죄악은 나병과 속성이 비슷합니다. 은밀성 탐욕성 번식성 파멸성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삼하 1127절 말씀입니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우리아의 장례가 마무리되자 밧세바를 정식으로 자신의 처로 삼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무마된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보고 계셨으며 다윗의 행위가 악하다고 선언하십니다.

다윗은 감쪽같이 완전범죄라 여겼지만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139:8)”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람의 눈도 피하기 어렵습니다. 가는 곳마다 감시카메라가 있습니다. 하루 동안의 나의 동선이 다 밝혀집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내 중심을 살피시며 훤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거나 묵상할 때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여기고, 은밀히 남을 속일 때는 하나님께서 모르실 것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실수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다섯째, 죄값은 치러야 합니다.

삼하 12:10~11말씀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3장을 보면 다윗의 장남 암논은 이복 누이 다말을 강제로 겁탈을 합니다. 그러자 이를 분하게 여긴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기회를 잡아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합니다. 이에 다윗은 큰 슬픔에 잠깁니다.

14. 이복 형 암논을 살해하고 그술로 도피했던 압살롬이 다윗의 귀환 허락으로 마침내 약 3년간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친 다윗 왕을 알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5. 부친 다윗 왕을 알현한 이후 압살롬은 대략 4년 동안 은밀히 반역을 준비한 다음 마침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다윗 왕은 예루살렘 왕궁을 떠나 급히 피신합니다.

16. 예루살렘을 장악한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에 따라 대낮에 옥상에다 텐트를 치고 부친 다윗 왕의 후궁들과 동침을 합니다.

18. 마침내 다윗 군대와 압살롬 군대의 일전이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집니다. 여기서 반역자 압살롬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크게 비통해합니다.

19.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계속 슬퍼하던 다윗은 군대 장관 요압의 책망을 듣고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환궁합니다.

이토록 죄의 씨앗은 자라고 자라서 일파만파 번져서 다윗 왕가를 고통과 슬픔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여섯째,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고 회복되는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침상이 눈물이 젖도록 통회 자복하게 됩니다. 다윗 왕의 처절한 통회는 시편 51편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삼하 1213~14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값을 치루게 하시되 그의 회개를 받으시고 그의 생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솔로몬이 태어나게 하시고 대를 이어 왕위가 이어지게 해 주셨습니다(삼하 12:24~25).

 

우리도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는 하나님의 징계를 의식하며 회개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허물과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23~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야고보서 515~16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로마서 623절 말씀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인도인을 구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선교사(터커)에게 힌두교 승려가 찾아와 자꾸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선교사님은 승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논쟁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그대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대는 하루에 도대체 몇 번 정도 죄를 범합니까?”

승려는 글쎄요라고 한마디 말한 채 잠시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물었습니다. “하루에 다섯 번 정도입니까?” 승려가 대답했습니다.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열 번 정도입니까?” “아니 그보다는 많겠지요.” “그러면 50번 정도입니까?” “그렇게 많이 범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이 말을 들은 선교사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승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10번 정도 죄를 진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60년을 산다고 칩시다. 그러면 사람이 일생 동안 20만 번 가까이 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도대체 그 죄들을 어떻게 처치하렵니까?”

승려는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방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선교사님은 마음속으로 '바로 이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구주 되신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 받았고 이제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엄중하고도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특별히 물질이나 이성 관계에서 정직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도 정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은근슬쩍 넘어갈 수 없습니다. 낱낱이 정직하게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정산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것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사람과는 화해하고 주님께는 용서를 빌어 자유함을 얻는 삶을 좇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도문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 하나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음을 기억합니다.

크고 작은 허물을 고백하여 용서받게 하시고 반복적인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힘을 주옵소서. 나 자신과 세상과 사탄의 역사를 이기게 하시고 의연한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