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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1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덕정교회 2024. 4. 18. 19:33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왕상 14:6~10, p.538, 57:2, 423, 438)

 

여로보암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최선은 오히려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까지 파멸의 길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든 우상들과 그가 세운 제사장들과 그가 정한 절기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자신을 위한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9절 끝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로보암의 중심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자신의 등 뒤에 버렸다는 것은 욕망을 앞세운 나머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뒤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 하나님을 자신의 이용 가치로만 여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 더미를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10~11).”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섭섭해하셨습니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독한 마음을 토로하셨습니다.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시며, 진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많이 주실지라도,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에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배설물과 쓰레기 취급하며 그의 등 뒤에 버림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와 그의 가문을 거름더미를 쓸어버리듯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상이라는 것은 비율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루하루에서 하나님이 차지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인가? 나의 모든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백분율로 볼 때, 100을 전부 차지하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 50, 혹은 60을 차지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모든 것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all or nothing), 둘 중에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과 올곧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한순간이라도 잊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주인으로 대접받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얼마든지 우상이 끼어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우상이란 하나님을 자기 편한 대로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편한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때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부속되어 끌려다니는 우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끝내 탈피하지 못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 가진 우상을 숭배하는 결과를 낳고 말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22년 동안 여로보암이 한 행동을 성경은 한마디로 우상숭배로 요약합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왕이 된 직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2년 동안 그를 기다려주셨고, 참아주셨고, 분명한 경고의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이 진정한 신앙인이었다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경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아들이 질병을 앓게 되었을 때(왕상 14:1~5), 제왕의 위엄을 내려놓고 다윗처럼 성전에 들어가 금식하고 눈물로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요구하신 것은 간단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까 회개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로보암 왕처럼 어리석고 교묘하게 버티지 않기를 원합니다. 여로보암에게 오랜 기회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결국 그는 죽었고, 기회를 살리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서는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 무엇을 순종해야 하는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오늘, 바로 지금, 아직 기회를 주고 계실 때에, 회개하며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등 뒤에 버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주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7~9).”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복 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산 햇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루를 살아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정직하게 행했느냐, 아니면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내 손에 붙잡힌 대로, 내 욕망으로 표현된 금송아지를 섬기며 살았느냐로 평가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한 그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데 있습니다.

 

골로새서 216~2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살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하고 먹음직스러운데 실제는 먹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입이 무성하고 화려했으나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저주를 하셨을 때 나무는 곧바로 말라버렸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일지라도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거나 주님을 우선순위에 모시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네 종류의 신앙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겉과 내용이 일치하는 신앙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둘째는 내용은 있으나 겉이 없는 신앙은 그런대로 보아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겉은 있으나 내용이 없는 신앙은 위선과 외식입니다. 넷째는 겉도 내용도 없는 신앙은 꼴불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며, 날마다, 매순간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회를 주실 때마다, 새롭게 주님을 따라가는 알곡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생사화복과 이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말씀에 순종하여 유무형의 어떤 우상이라도 섬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하나님으로 반듯하게 섬기는 믿음과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창세기 4:1-8을 읽어 보면, 두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예배를 드렸지만 한 사람은 은혜를 받고 한 사람은 예배 후에 시험에 들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시험이 든 이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가인은 결국 동생 아벨을 죽여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혹시 누가 미워지면,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면, 내 마음에 혈기가 끓어오르면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 생활 바르게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 생활 기도 생활 교회를 위해 봉사 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28-29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예수님이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하셨습니다. 믿는 것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우리의 일입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내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벨이 드린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는 믿음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가인이 그 마음에 동생이 미워지고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아,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4:6-7,새번역)”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듣지를 않았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악한 생각대로 동생을 죽이고 맙니다. 동생만 죽으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부터 가인의 인생은 지옥이 됩니다. 자신의 불행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불행과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 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동생만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가인은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고 그 마음이 공황 상태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과 피해망상에 빠졌습니다.

 

사람에게는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말은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본성을 통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으면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다르니 말씀을 받고 싶지를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면 받고 들지 않으면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여호보암이나 가인의 길을 가지 않기를 다짐합시다. 우리의 신앙이 늘 초심으로 돌아가서 겸손한 이성과 담대한 영혼으로 한 분 하나님을, 우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잘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주님, 주님만이 저희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구원하심이 오직 주님께 있음을 오늘도 겸손히 인정하며 하루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며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래서 저희의 삶 중심에 주님만을 모시게 하셔서 저희의 인생을 세우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