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눅 12:35~40, p.116, 마 24:44, 104, 179장)
재미교포 한 가정이 권총 강도의 위협 앞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경찰을 가장하고 집으로 침입한 두 명의 강도에게 3시간 정도 인질로 잡힌 채,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경찰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문을 열어 주었는데, 갑자기 총을 꺼내 들고 몰아치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되돌아보니, 이상한 것은 갑작스럽게 총을 마주하고 나니, 두렵고 떨리고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담담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덕분에 이성을 완전히 잃을 정도로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려서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돌아보면서, “무엇이 나를 그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어 주었나?”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①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 재미교포는 강도들이 달라는 대로 주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문득 한 쪽 방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아내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아, 그래, 내가 믿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준 하나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②다른 하나는 그 부부가 얼마 전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물질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준비를 해 둔 일이 있었습니다. 사건 발생 1달 전에, 동생을 암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동생의 장례식을 다녀 온 후, 이 부부는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며, 자신들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성찰을 해 두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 대해 의식할 수 있을 때, 현재가 제대로 보입니다. 마지막에 있을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곧 오신다. 그러므로 깨어 일어나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지내라.’
또 다른 하나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맡겨 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을 주님이 보시게 된다면 그 종은 복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언젠가는 주님 앞으로 가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 살아생전에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종말(終末eschatology)이란 시간이나 사건의 끝. 마지막을 말합니다. ①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끝(민 23:10; 시 39:4)을 의미합니다. ② 우주적으로는 세상이 끝나는 시간(신 32:29)를 가리킵니다. ③ 구속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마 24-25장)를 말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서는 예수님이 오실 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분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는 “누구시지요?”라고 인사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라고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에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종말 의식과 청지기 의식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분입니다. 청지기가 된 종은 주인의 집과 토지는 물론 다른 종들까지 관리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청지기들은 언젠가 주인 앞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계산하는 날이 옵니다. 결산을 하는 날, 어떤 청지기는 칭찬과 상급을, 어떤 청지기는 책망과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1. 깨어 있는 청지기는 허리에 띠를 띠고 있는 자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있다는 것은 일할 태세가 준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의복은 여인들의 원피스와 비슷합니다. 치렁치렁 끌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활동하려면 허리를 동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순례자가 길을 떠날 때에 띠를 띱니다. 군인이 전쟁에 떠날 때에 허리에 탄띠를 착용합니다. 종이 일하려고 할 때에 허리를 두릅니다. 예수님도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옛날 엘리야도 가죽 띠를 띠었고 세례 요한도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옥에 갇혔던 베드로를 출옥시키기 위해 나타난 천사도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고 하였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는 일은 하나같이 민첩한 행동을 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특히 성경은 ‘진리의 허리 띠’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고 근간이 되고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2. ‘등불을 켜고’ 그랬습니다.
등불을 켜라 하심은 낮이 아니라 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의 안목으로는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 차 보이지만 영적 안목으로 보면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둡습니다. 캄캄합니다. 어둠의 그림자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심적으로 고통 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온갖 향락 산업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살인과 부정과 부패와 전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둠의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등불을 켜야 합니다.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서 등불을 켜고 깨어 있는 종을 주님이 보실 때 그 종은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밝혀야 할 등불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비추임을 견지하는 일입니다. 내면의 세계에 임재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감지해야 합니다.
3. ‘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까지 켜 두었으면서도 영적 게으름과 나태함에 떨어지면 안 됩니다. 언제라도 주님이 오시면 뛰쳐나가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 있으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이 오지 않으면 자리에 누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면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습니다(36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달려 나가 주님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지 않거나 늦게 열 때에는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내어 쫓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하십니다.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기쁘게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이경이나 삼경에라도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을 맞이하듯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2경이나 3경은 밤 9시에서 새벽 3시 사이 한밤 중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깨어 있는 것’은 단지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문화에 빠져 살지 않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함으로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심령을 잃지 않는 것이 깨어 있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삽니다. 길손(행인)으로 살아갑니다. 천년만년 눌러앉아 살 곳이 아닙니다. 목적지가 따로 있습니다. 기다리고 만나야 할 분이 계십니다.
어느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복권을 사서 한 주간을 기다리며 지내는 일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언제나 자신이 들고 있는 번호가 당첨은 안 되지만 매주 5천 원을 투자하여 복권을 사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일시적이지만 나를 행복하도록 만들어 주고 가슴 설레게 해 주었으니 그 정도의 돈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매주 복권을 사서 당첨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가 주님 뵈올 날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것은 망상도 아닙니다. 헛된 꿈도 아닙니다. 어리석은 일도 아닙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소망이요 꿈이며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는 가운데 선취적인 기쁨을 맛보며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 있습니다.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상좌)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37절)고 하십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깨어서 기다리던 종을 위해 이제는 주인이 허리에 띠를 졸라맵니다. 그리고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종을 섬깁니다. 주님께로부터 융숭한 접대를 받는 영광을 얻습니다.
주인은 그 모든 소유를 깨어 있는 종에게 맡기리라(44절)고 하십니다. 일종의 통치권을 부여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작은 왕들이 되게 하십니다. 주인의 신임 받은 종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반면에 깨어 있지 못한 종들과 그들이 받을 징벌이 나옵니다. 악한 종들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45절)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고 취하여(46절) 방종과 타락의 삶을 삽니다.
이때 주님은 오셔서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못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한다고 하십니다(46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한 자는 많이 맞을 것이며(47절)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48절).
말씀을 정리합니다. 본문 가운데 드리워진 분명한 메시지는 청지기는 마땅히 종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건전한 종말의식과 정당한 위기의식이 필요합니다.
종말이란 두 가지 차원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종말입니다.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호출하여 불러 가실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종말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고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영원하신 나라로 진입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일지 모른 가운데 다가옵니다.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긴장하고 깨어 지내야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40)”고 하십니다.
이사야 5:27에는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들메끈은 끊어지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허리띠를 동여매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주님이 지금 오신다고 해도 당황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나가 있는 한국 목사님이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황량한 길을 홀로 걸어가시던 어떤 노인을 차에 태워드렸습니다.
가던 중에 그 노인이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어젯밤에 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목사님은 이 노인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서 차를 급하게 세우고는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천국에서 벌어진 일을 아십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하기를 “지난밤 천국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잔인함과 타락함에 진노하셔서 천사들에게 심판의 나팔을 불으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일제히 나팔을 들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을 불려고 하는 순간 성자 예수님께서 “저의 흘린 피를 기억하소서” 하시며 하나님께 간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성도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악한 자들의 악을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으셨지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노라.”
성자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천사들에게 명하여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세상으로 내려가 나의 심판의 첩경을 평탄케 하며 사람들에게 심판이 가까웠다고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인의 말에 놀란 목사님은 “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것을 아십니까?”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이지리아로 보내진 그 천사들 중에 한 명이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메시지를 전하시오. 낭비할 시간이 없소. 부탁하오”하고 그 노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나 자신의 믿음을 날마다 점검하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0절)고 하십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42절)고 하십니다. 이것은 맡겨주신 직분과 소명에 충성하는 것이 깨어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청지기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 충성하지 못하고 나의 소유, 나의 욕심, 나의 성취에 심취되어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소홀히 하기 십상입니다.
깨어서 그날을 기다리는 자가 되십시다. 그날을 기다리며 맡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지내다가 기쁨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길 원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다시 오실 그날을 기대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래서 날마다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