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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세속화된 교회

덕정교회 2025. 6. 13. 19:15

세속화된 버가모 교회

(2:12~17, p.400, 고전 10:23, 31, 342, 368)

 

리처드 니이버(Richard Niebuhr, 1894-1962)의 명저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 문화 사이의 관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니이버는 두 가지 양 극단적인 입장을 소개합니다.

 

먼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입장을 가리켜 '문화에 대적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속적인 문화와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죄악시하고 세속 문화에 등을 돌리려는 입장입니다.

 

다음으로는 극도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입장입니다. 이를 가리켜 '문화에 함몰된 그리스도(the Christ of Culture)'라고 했습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의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세상 풍조를 그대로 따르는 입장입니다.

 

니이버는 이와 같은 양극의 입장이 다 문제가 있다고 보면서 가장 적절한 해결책으로서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라는 입장을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속 문화를 등지고 산속에 칩거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무섭다 해도 교회는 홀로 거룩한 척, 고립해서 살 수 없습니다. 세상 한가운데,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을 위해, 주님의 거룩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함께 떠내려가서도 안 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 풍조가 이런 데 교회라고 별 수 있나하면서 세속 문화와 야합하려는 자세도 큰 문제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자세는, 니이버가 주장한 그대로, 교회는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입니다. 온갖 죄악과 불의와 우상숭배가 판을 치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켜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세상 문화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세상을 변혁시켜 나가는 교회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버가모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믿음의 순수성을 잘 지키는 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세속 문화와 완전히 타협하여 끌려다니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 중에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에베소 다음으로 번영했던 도시가 버가모였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것은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의 본거지가 버가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상과 잡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즐비한 곳이 또한 버가모였습니다.

특히 버가모 사람들은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라는 뱀신을 숭배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각종 병을 치료하는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뱀신을 '구주 아스클레피오스'라고 부르면서 거대한 신전까지 지어놓고 뱀신 숭배에 열을 올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뱀을 사단의 모형으로 보았기 때문에, 본문 213절의 '사단의 권좌'라는 표현은 이 뱀을 숭상하는 신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양 극단적인 압력과 유혹을 많이 받은 교회였습니다.

한편으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은둔형 교회가 되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경우 믿음의 순수성을 지킬 수는 있지만 선교의 어장을 잃게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세상과 타협해서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유혹입니다. 이 경우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하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교회가 세상 문화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가 머리에 앉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둥지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유혹에 대해서는 우리가 막을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인이 박히고, 삶이 되는 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세상의 가치는 우리를 흔들 만큼 달콤하고, 보암직합니다. 이러한 유혹이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지만, 우리는 이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상 풍조에 빠져 쉽고 편안한 길을 가려는 교회를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신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크게 두 가지를 칭찬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로, 버가모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지켰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조를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안디바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디바라는 사람은 버가모 교회가 낳은 순교자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인 것 같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안디바는 불로 달군 놋쇠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순교 당한 주기철, 최봉석 목사님 같은 순교자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와 같은 순교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에도 지조를 꺾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담력을 가지고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붙들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이 어렵고 가혹한 시대에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낸 버가모 교인들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버가모 교회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누가 핍박을 받거나 순교 당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어 아주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원리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기 쉬운 시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고, 예수 믿기 어려운 시대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예수 믿기 쉬운 시대일수록 참된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와 같은 핍박이나 환란을 당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우상들과 세속주의의 유혹에 둘러 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한 책망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4~15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는 밖으로부터 찾아오는 환난과 핍박은 잘 참아내고 견뎌 냈지만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목회자들이 마치 발람처럼 하나님의 참 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발람'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참 말씀을 전하지 않았던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22~25장 말씀을 보면 '발람''발락'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족속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두려워한 모압의 왕 발락이 꾀를 냅니다. 선지자인 발람을 자기 나라에 초청해서 이스라엘을 제발 저주해달라는 작전이었습니다.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발락이 보낸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그들의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발락이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락이 더 높은 사람들을 보내고 계속해서 물질 공세로 유혹했을 때 마침내 발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모압왕 발락에게 참으로 무서운 흉계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31: 16). 모압 여자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 바알브올 앞에 우상 제물을 차려 놓고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해서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계략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종이나 세상의 명예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참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입니다.

 

둘째로, 버가모 교회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문제였습니다.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는 시리아 안디옥에서 태어났으며,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골라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72명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안수까지 받았던 집사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초기 교회 박해 때 은둔생활을 하면서 따로 교리를 정립 하였습니다. 니골라가 정립시켰다는 교리가 어떤 것이기에 예수님도 미워한다고 하였을까요?

교회사와 역사 속에 의하면, 니골라의 교리는 구원에서 행함(순종)을 부정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는 중요한 요소는 영만이 구원받는다. 그래서 육신은 땅에 묻어 썩어지므로 육신을 마음대로 즐겨도 된다며 행위를 부정시하는 교리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니골라 당은 전형적인 상황 윤리 주의자들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윤리 도덕은 시시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칭 진보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니골라 당의 방종 주의, 상황 윤리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 교인들은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쫓아 기회주의적이고 방종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주신 권면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여러분, 이 말씀은 12절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마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온유한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무섭고도 두려운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 결론의 말씀입니다.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발람과 니골라 당의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만나는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천국 제품(MADE IN HEAVEN)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먹여주셨던 하늘 양식입니다.

오늘 우리도 내 자아와 세상과 어둠의 세력을 이겨내며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신령한 양식으로 배부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흰 돌이란 고대 로마 사회에서 학문이나 체육, 법률 부문에 뚜렷한 성취를 하게 될 때 주었던 상()입니다.

그리고 흰 돌은 순결과 성결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모든 주권을 주님의 손에 맡길 때 우리의 신분이 거룩하게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밖으로부터 오는 환난과 내부로부터 오는 유혹을 믿음으로 이겨내면 우리는 새사람이 됩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돌에 새 이름이 새겨지듯이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을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우리 모두 믿음의 순수성을 잘 지켜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버가모처럼 부유하며 아주 발달한 곳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어둡고 혼탁한 곳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세상은 끊임없이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과 같은 잘못된 사상과 문화를 우리에게 강요할지라도 잘 이겨내게 하옵소서. 교묘하게 우리를 미혹시키며 세상과 타협하게 만드는 시대의 풍조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만을 붙잡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신앙과 믿음의 공간 속에서 늘 주님을 기억하며 끝까지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