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감사하라
(눅 17:11~19, p.125, 신 16;16~17, 491, 494장)
소록도라는 섬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한센병자들의 한이 서려 있습니다. 일제 시대 때 한센병자들을 강제수용하기 위하여 계발된 곳입니다. 당시 동원된 사람들은 뗏목을 타고 완도지역에까지 가서 반석을 운반하기도 하고 건물을 세우는 일이나 공원을 꾸미는 일 등 중노동에 시달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 해방 이후 민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병자들을 담보하여 사리사욕을 챙기는 형태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약 5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거의 100%가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들은 예배 시간에 빠지는 일도 없고 예배 시간을 어기는 일도, 예배 시간에 조는 일도 드물게 믿음 생활을 잘 합니다.
방문객들은 그들이 신세를 한탄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감사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도 한센병자들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일체 금지되고 무조건 격리수용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의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촌을 지나가셨습니다(11~12상). 10명의 병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소리를 높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구원을 요청합니다(12하~13절).
주님은 즉각적으로 치병을 허락하셨습니다(14절). 14절에 ‘저희가 깨끗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주님의 모습은 ①소외 받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②그들의 구원요청을 들어주십니다. ③모든 것의 창조자시요 모든 병의 치료자가 되십니다. ④말씀 한마디에 천하를 움직이는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15~16절을 보면 병에서 치유를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게 했으니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17~18절을 보면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을 야속해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홉 사람의 반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병이 치료되자 달려와서 감사를 표현했던 사람과는 달리 치유의 은총을 고마워할 줄 모른 아홉 사람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①자신들이 앓고 있는 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호전 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②다른 하나는 자신들이 병을 고침 받은 것은 나을 때가 돼서 나은 것이지 예수님이 고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③예수님이 고쳐준 것을 알면서도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경우입니다.
오늘날에 우리도 여러 가지 은총을 입고 살면서도 감사는커녕 오히려 원망과 불평에 쌓여 지내는 경우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례하지 못하는 아홉 명의 모습을 통해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고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은 곧 우리를 향하신 음성이 아닌가?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19 구급대의 발표에 의하면 긴급 상황이 생겨 병원에 이송한 사람 중에 '감사하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사람의 죄성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은 죄악된 습성이 있어 감사 거리보다 원망 거리를 찾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없는 것 보면서 불평합니다. 잃은 것만 보고 원망할 것만 찾아 감사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성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 말씀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매 순간 숨 쉬는 공기 속에 산소가 있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니까 산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땅이 존재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물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니까 감사하지 못합니다. 남편이 있는 것, 아내가 있는 것, 자녀가 있는 것 당연히 생각하니까 감사를 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세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디모데 후서 3장 2절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는 해석을 잘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해석입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감사하기 위해 찾아 온 사람에게 큰 칭찬과 격려와 축복을 선포해 주십니다. 19절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맥추 감사 주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의 영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다른 점은 영성입니다.
닥터 스코프라는 분은 말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것과 감사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하느냐, 불평불만의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환경이 수도원이 될 수도 있고 감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축복의 길입니다. 영국의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점점 더 풍족한 삶을 살게 되지만,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들의 모든 삶을 풍성한 삶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첫째, 우선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감사는커녕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심을 수 있는 땅이 있는 것을 감사하며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 감사하며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감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둘째,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익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다윗은 아들과 신하들에게 배신당하고 쫓겨 다니는 가운데서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명 싸개 속에 자신을 감추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고백을 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가야 하는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달리 생각할 수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하박국은 아무 열매를 얻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함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고문과 매를 맞으면서도 감사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해 힘들어하면서도 큰 깨달음을 얻고 감사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기쁠 때, 잘될 때, 행복할 때, 좋은 일이 생길 때 감사합니다. 물론 감사할 일들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감사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셋째 최선을 다하는 감사가 요구됩니다. 성경에 과부의 두 렙돈을 가리켜 정성을 다한 풍성한 헌금으로 평가했습니다. 그의 헌금은 인색한 감사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감사였습니다. 최선의 감사는 양에 있지 않습니다. 최선에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감사는 가장 풍성한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에 보게 되면 헌금의 원칙을 몇 가지로 가르쳐 줍니다. ①하나님께 복 받을 수 있는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② 정한대로 할 것이요 억지로 하지 말 것이며 ③인색함으로 하지 말며 풍성한 헌금을 하라고 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1급 지체 장애의 몸을 가지고도 남이 갖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진정 풍성한 감사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의사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건강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는 너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 존 자웽이라는 사람이 발표한 감사 기도의 효능이 세 가지였습니다. 식사 때마다 감사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첫째, 질병을 예방해주고 면역 기능을 향상시켜 주는 신비한 백신이 나온다는 겁니다. 둘째, 질병의 진행을 억제 시켜주고 병균의 침입을 막아주는 요소가 생깁니다. 셋째, 일종의 방부제 성분으로서 위장 내에 있는 음식물이 부패하거나 발효하는 것을 억제시켜 주는 성분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감사하며 음식을 먹을 때 우리 몸이 먼저 반응하여 유익한 것들을 생산해낸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감사하지 않고 먹는 진수성찬보다, 반찬이 김치 하나라도 감사하며 맛있게 먹을 때 이것이 우리 몸에 더 보약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의 능력이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여러 차례 부유하면서 다투는 집안보다, 가난하지만 서로 위하고 사랑해주는 집안이 더 낫다고 계속 말씀하는 이유가 그런 것입니다.
찬송가 23장 1절에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9~20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①구원받은 자의 신앙은 감사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②감사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③감사한 만큼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풍요롭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④성공했기 때문에 감사가 아니라 감사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는 의무가 아닙니다. 권리입니다. 감사는 범사에 유익합니다.
다함께 기도하십시다.
기도문/
주님, 어리석고 미련하며, 완악하고 교만하여 원망 불평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깨우침으로 적은 일에서도 감사할 줄 알게 하시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며 훈련받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