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7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고전 15:50~58, p.285, 고전 15:20~22, 165, 171장)
50대 초반의 젊은 사람에게 다가온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50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이루며 성공자의 반열에 서 있었습니다.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학위도 받고 돈도 사랑도 가정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왕성한 사업은 년 중 3분의 2를 외국 출장에 시간을 보내게 하였고 주변의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외국 출장에 과로가 겹쳐 감기에 걸렸는데 좀처럼 낫지 않고 피곤함을 호소하다가 모처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진단 결과 ‘급성 간암’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이제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이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를 찾아가 고백한 이야기 가운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저에게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이러한 일이 내게 있을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8, 90이 돼서야 죽는다고 누가 보장이라도 해 준 것처럼 살아왔을 뿐이 아닌가요? 죽음이란 언제나 현실이며 아직 어리거나 젊거나 간에 오늘에 나의 사건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정말 나에게는 죽음의 날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오고 있을까요? 그 많은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도 정작 내 차례는 없는 줄로 착각할까요? 이것은 그만큼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10가지는 비타민C, 퀴닌(말라리야 약), 모르핀(고대에 진통제로 쓴 마약), 마취약, 소독약, 살바르산(매독약), 설파제(항생제), 페니실린, 아스피린, 에이즈 치료제입니다.
10가지 항목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하면 병을 극복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질병이 정복되었으나 죽음을 극복하는 약이나 방법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죽음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란 참으로 무력하고 비참하며 허무합니다. 죽음 앞에선 동물보다 인간이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짐승에게는 없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불안해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더 비참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 모든 것을 굴복시킵니다. 누구나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정 사진 앞에서 울고 있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죽은 어머니의 영혼이 다가와 위로의 노래를 부릅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의 내용입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될게요.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줄게요.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당신을 지켜줄게요.
나의 사진 앞에 서 있는 그대. 제발 눈물을 멈춰요.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아요. 죽었다고 생각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무슨 이야기입니까? 죽음의 불가피성을 운명으로 안고 있는 인간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가 슬퍼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운명으로 떠안은 인간은 죽음 너머 구원을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고약한 죽음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죄와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죄와 죽음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약 1:15). 근본적으로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도 있음을 증거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은 죽음을 종말이 아니라 사망 넘어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열어 주는 관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서 죽음이란 저주와 형벌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통로요 더 높은 차원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본문 고린도 전서 15장은 유명한 부활장입니다. 전장(58개의 절)에 걸쳐서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부활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증표요 모든 의와 진리와 생명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인간 이성으로 쉽게 이해되거나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전 15장은 “부활이 없다면”이라고 하는 말이 여덟 차례나 나옵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확실한 증거 앞에서도 오히려 의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십니까? 여러분의 부활이 믿어지십니까?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신비요 기적이요 사건입니다. 이때 부활은 회생이라든가 옛 생명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생명의 죽음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재 창조적인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부활을 몇 가지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를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무덤 앞에 도착한 여인들은 무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인들에게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말했습니다(눅 24:1~4).
둘째는 부활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약속된 예언의 성취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는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①각종 위험을 무릅쓰고 생활한 점 ②날마다 죽음과 직면하는 힘든 생활을 자초한 점 ③방탕과 방종의 삶을 멀리하고 깨어 의를 실천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넷째는 오늘날도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부활의 신앙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부활은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습니다. 막 16:6에는 “…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둘째는 종말적으로는 주님의 재림 시에 이루어질 모든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부활을 설명하는 가운데, 주님 재림 시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상태로 홀연히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고 했습니다.
셋째는 현재 오늘도 믿는 자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을 보면 연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던 바울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에게 미래를 위한 소망(for the future)일 뿐 아니라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늘의 소망(from the future)이자 능력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디엘 무디의 말입니다. “전엔 축복받는 것이 내 소원이었더니 지금은 주님 자신이 내 소원이며/ 전엔 내 감정 중심이었더니 지금은 그의 말씀 중심이며/ 전엔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였더니 지금은 쉬지 않고 찬송하며/ 전엔 내가 주님을 사용하려고 하였더니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원한다.”
교우 여러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길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인류와 아담과의 관계는 유전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적입니다. 우리 인간은 유전적으로는 멸망과 저주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사망을 삼키고 이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문제 풀이를 해보겠습니다.
1.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50절)
1) 썩을 것: 인간의 혈과 육,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2) 썩지 아니할 것: 부활의 몸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부활의 몸을 농사를 빗대어 설명합니다. 식물의 씨와 그 씨에서 나온 식물을 생각하면서 부활의 몸을 가름해 볼 수 있습니다. 씨가 죽어야 거기서 다른 형태의 식물이 나옵니다. 씨가 죽고 난 뒤에 각 종자에 따라 씨와 다른 형태의 식물이 나오듯이 죽은 자의 부활 체도 마찬가지입니다(35~38절).
또한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생명체의 육체가 다르듯이 부활 때의 몸도 영광도 다릅니다(39~41절).
부활의 몸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면(42~43절)
①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납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②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죄됨이 없습니다.
③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질병과 노화가 없습니다.
④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삽니다. 시공을 초월한 몸입니다.
2. 썩는다는 말이 본문에 여러 번 등장 하는데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1)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가리킵니다.
2) 주님 없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 실패와 절망을 의미합니다.
3) 고전 15장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25번, 부활이란 단어가 24번 나옵니다.
3. 사망(인류의 원수)의 원인은 무엇인가?(56절, 약 1:15참조)
사망이 왕노릇한 것은 죄로 인한 형벌 때문이며 그 죄의 형벌이 율법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에 따르는 율법의 정죄함과 판결은 사망입니다.
4. 종국적으로 사망은 언제 극복된다고 말하는가?(51-54절)
1) 마지막 나팔 소리/ 예수 재림 시에 마침내 인류 최대의 적인 사망이 패배를 당하고 사라지게 됩니다.
2) 주님 재림 시까지 살아 있는 자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홀연히 변화됩니다. 이것은 밝혀진 비밀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완전히 정복되는 궁극적인 승리의 날, 우리는 그때 이렇게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
5. 부활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될 주님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에수님을 믿는 일이 주님의 일이요 아가페적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사랑에서 나온 행실만이 참된 열매요 상급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과 유혹을 뿌리치며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55~58절). 믿음 안에서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영생과 상급)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58절).”
우리 모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면서 계속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다가 그리고 종말에 결정적인 부활의 세계에 이르는 행복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1.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2. 부활의 능력으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3.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