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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8 절실하고 처절한 심령으로

덕정교회 2022. 12. 17. 08:29

절실하고 처절한 심령으로

(15:21-28, p.25, 11:6, 433, 543)

 

과거 어려운 시대에 한국교회는 부르짖는 기도로, 처절한 기도와 간구로 세계교회 앞에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소위 코리안식 기도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 덕정교회도 절실함과 처절함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서 응답받은 간증들이 있습니다. 장순정 장로님과 김을엽 권사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두 분은 장애를 가진 아드님들을 장가보내기 위해 각각 2~3년을 매월 한 차례 일정액을 들여서 식료품을 구입하여 목사관에 들여보내 주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아는 대로 우리나라의 농촌 총각들이 한국 여성과는 결혼을 못해서 외국 여성과 결혼을 하여 사는데, 두 분은 아드님들을 한국의 따님들과 결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게 했습니다. 처절하고도 절박한 믿음은 주님의 응답을 받는다는 산 간증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상대적으로 절실함이 부족합니다. 생활 전반이 예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습니다. 처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억지를 부리는 집요함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필요성도 없어졌습니다. 주님을 찾는 일이 예전보다 부족합니다. 영적 나태함과 태만이 우리 안에서 꽈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이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을 만나 운명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지기수로 나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절실함과 처절함으로 억지를 부리다 싶을 정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 같이 문제를 해결 받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 복 받을 사람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위나 물질이나 세상적인 조건에 앞서 주님의 은혜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가 세상적으로 출세를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적으로 출세를 하였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조건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외적이며 물질적인 부분에서 필요가 충족되었다고 할지라도 내면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영혼의 절규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심령으로 정신과 내면과 영혼의 풍요와 부요함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3~6절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무슨 말씀입니까? 절실함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여 은혜를 구할 줄 아는 심령이라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요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위로와 부요함과 만족함이 보장될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믿음과 관련하여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없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11:20-24의 불신자 유대인들). 이 사람들은 주님을 찾지도 않거니와 대적하며 삽니다. 둘째, 믿음이 적은 자들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14:31의 제자들). 주님을 영접하고 의지하면서도 반신반의하는 모습입니다.

셋째, 믿음이 큰 자를 향해서는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믿음이 크다는 말은 세상 것보다 주님을 크게 여긴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좀처럼 요동치거나 흔들리지 않는 메가톤급 믿음입니다.

 

본문에 나온 가나안 여인은 딸아이가 귀신이 들려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몇 년을 지냈는지는 모릅니다.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여서 고쳐보려고 하였지만 점점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을 방문하신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황급히 달려 나가 예수님께 딸아이의 형편을 아뢰고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절박함을 갖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억지를 부리다 싶을 정도로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문제를 해결 받고 믿음의 산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며 흐뭇해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감탄하시며 소원을 들어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신앙생활에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1. 소리 질러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22). 가나안 여인은 부르짖는 기도를 합니다. 자신의 처절함에 대한 표현이요 고백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면 기도의 무릎을 꿇기까지가 그렇게도 어렵습니다. 속된 말로 주님께 나오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운지 죽기보다 더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벌써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처지를 아뢰며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면 이미 벌써 문제를 해결 받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 응답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1:24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33:3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교우 여러분, 우리의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앙생활에서 기도의 문이 열리든지 찬송의 문이 열리든지 말씀의 문이 열리든지 무엇인가 하나는 열려야 숨통이 터집니다. 영혼이 살아나고 살판이 납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형통함을 경험합니다.

 

2. 가나안 여인은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믿음으로 예수님께 간구합니다(23~27).

우리가 잘 아는 발명왕 에디슨이 전구를 개발하는 일에 999번의 실패를 극복하고 나서야 성공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경험상으로도 무슨 일이 한두 번에 쉽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매어 달려서 값진 성과나 업적이 성취되는 법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인내와 끈기, 불굴의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움을 요청해 온 여인에게 주님의 태도는 냉정했습니다. 부르짖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이셨습니다(:23 ). 아예 완강하게 거절하셨습니다(:24).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은 나는 만나 줄 사람들이 따로 있어 너에게까지 관심을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25). 이때 예수님은 여인을 개로 취급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한마디로 은혜를 입기에 무자격자라고 하십니다. 이쯤 하면 여인은 치욕을 느낄 만도 한데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면서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식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싸늘한 반응을 마주했습니다. 외면과 거절과 침묵을 마주했습니다.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을 만합니다.

우리도 때때로 나의 기도가 주님께 상달 되어 응답받기까지는 침묵과 외면과 거절의 시험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 속에서도 가르침을 들으며 무응답 속에서 오히려 응답을 발견하는 믿음의 귀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엄마는 아이가 더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기르기 위해서 부득불 젖 달라고 울어대는 아이를 거절하고 외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애처롭게 울어대는 아이를 모른채 해야만 하는 엄마의 심령처럼 주님께서도 때로는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시고 침묵하시지만 오히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은 자신이 거부당하고 외면당하는 상황에서도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서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가나안 여인처럼 자존심도 버리고, 인생 계급장도 내려놓고, 장애물도 뛰어넘는 불굴의 믿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입는 데 가장 방해되는 요인은 외부적인 환경보다 나 자신이 문제일 때가 더 많습니다. 자존심 하나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계급장을 내려놓지를 못해서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주님께 간청하지를 못합니다. 우리 모두 영적 안목과 민감성을 회복함으로 주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필요한 상황인지를 알아차려서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시편 34:6 말씀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 가나안 여인은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응답받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됩니다(28).

본문 마 15:28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가나안 여인은 위대한 믿음, 칭찬받는 믿음, 불굴의 믿음, 응답받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온 사람입니다. 결국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 소원을 성취하였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기억합니다. 그 아들 어거스틴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를 신봉하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볼 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로서는 아들 어거스틴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며 눈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10년이 넘게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낙심했습니다. 한 번은 너무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서 자기 교구의 암브로스 감독을 찾아가서 아들의 심령을 위해 호소하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신부님, 제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신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제 아들의 심령을 위해 기도 드렸지만 하나님은 제 기도에 아무런 응답이 없으십니다. 제 아들이 돌아오기를 10년이 넘게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면서 신부 앞에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습니다.

이 때 눈물을 흘리며 애타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암브로스 감독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자매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낙심하지 마세요.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암브로스 감독의 격려의 말에 힘을 얻은 모니카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우리 기독교 역사상 빛나는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누가복음 187~8절 말씀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교우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믿음의 열정이 식어지고 희미해져 갑니다. 우리도 다시금 신앙의 불을 지펴야 하겠습니다. 어떤 장애와 방해에도 넘어지지 않고 절실하고 처절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믿음, 큰 믿음으로 주님의 만날 뵐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주님의 침묵과 거절과 시험을 통과하여 은혜의 보좌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믿음으로 응답받게 하시고 문제를 해결 받는 감격을 맛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보기를 원하시는 식지 않는 뜨거운 믿음으로 주님을 뵙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