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9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
(눅 21:5-19, p.132, 벧전 4:7~8, 176, 171장)
오늘은 종교개혁(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 주일입니다. 이는 중세 교회가 말씀의 본질에서 떠나 종교화되어 가는 타락상을 목격한 마틴 루터에 의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기독교 내부의 대규모 개혁 운동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은 “고치다” 또는 “면모를 일신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자 풀이로 보면 “혁(革)”은 ‘벗겨낸 짐승 가죽을 무두질하여 털을 없앤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아픔과 고통을 각오하면서까지 변화와 회복을 이뤄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와 회복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라’는 고(故) 이건희 회장의 말이 다시 화자 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종말적 신앙과 삶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적인 개념에서 ‘마지막 때’라는 말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의미합니다(히 1:2).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건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붙어있는 개념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13 참조).
그래서 주님께서는 공생애 첫 설교 말씀에서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고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이 항상 임박한 종말을 살고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말적인 신앙과 삶’이 부과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말적인 신앙과 삶’이란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님이 재림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주님 품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일임으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깨어 있는 자세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시던 가운데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이 많은 헌물로 꾸며진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됩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유다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스룹바벨과 그의 동료들이 같은 자리에 다시 건축했지만 솔로몬이 지은 성전보다 작고 초라한 성전이었습니다.
이후로 예루살렘 성전이 엄청난 규모로 새롭게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헤롯 1세 때였습니다. 헤롯이 건축을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은 그 크기와 웅장함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으로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황금으로 뒤덮인 성전의 외양은 찬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그것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6절)”는 완전파괴의 끔찍한 예언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7절)”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은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거니와 이 세 가지 물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 당할 때와 징조를 묻고 있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재림의 때와 징조를 묻고 있습니다. 셋째는 세상 끝의 시기와 징조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종말의 징조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리라(8절)”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 거짓 메시야가 사람들을 미혹할 때, 미혹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합니다. 자기가 구세주라고 한다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종말의 시기와 때를 자기들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임박한 종말론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난리와 소요가 있을 것이고(9절), 민족과 나라들이 서로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1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내전이 벌어지고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은 전 세계를 어둠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셋째,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과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을 것이고(11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까이는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쓸었던 코로나-19 역시 전염병의 범주에 해당 될 것입니다.
넷째, 주님의 제자들이 집권자들에 의해 박해를 받으며 옥에 갇히고 그들 앞에 끌려가는 일이 있을 것이며(12절),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일과 순교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있을 것이라(16~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종말의 징조들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계속 나타나게 될 징조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 시대만이 아니라 역사 전체 속에 나타나며, 다만 주님 오시는 날이 가까울수록 점점 빈번하게 일어날 뿐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기록에서만(사도행전) 보더라도 메시야를 자칭하는 등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이 나타났고, 백성을 선동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자들도 나타났습니다(행 5:36-37).
또 큰 지진과 기근 같은 자연재해도 있었습니다. 행 11:28에 천하에 큰 흉년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사도 등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제자의 무리를 박해하며 옥에 가두고 회당이나 재판정에 끌어다 세우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순교자도 속출했습니다.
이제 종말 시대의 직접적인 징조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주후 70년경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타고 무너지는 일과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로 재건된 일과 요한계시록 16장 12~16절에 등장하는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마지막 큰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을 종말의 직접적인 징조들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아’/~에 올라 가다와 ‘마겟돈’/대량살육의 합성어입니다(삿 5:19, 왕하 9:27, 대하 35:22).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도 한 가지 질문이 생겨납니다. 주님께서는 불신 세상은 심판하시되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전은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종말의 징조로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해 보여도 예수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신앙이나 이와 관련된 모든 것은 파멸의 대상입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성전건축물에 집착하는 신앙은 사라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안 계시는 성전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는 소리보다 싸우며 떠드는 소리가 더 큰 성전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의 성전이든지 예배당 성전이든지 주님을 으뜸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성전이 될 수 없거니와 하나님의 심판이 대상이 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마지막 때의 상황을 맞이하여 취할 믿음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거짓 믿음과 허황된 말로 미혹하는 자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8절). 이는 영적 분별력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둘째는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9절). 이는 중심을 견고하게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집권자들이 박해하며 투옥시키며 그들 앞에 끌어다 세우는 일이 있을 때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고 하십니다(14절). 이는 인간적으로 염려하며 스스로 대비책을 강구하려 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는 끝까지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그저 수동적으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의로운 고난을 피하지 않고 당하는 것입니다. 싸워야 할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16~19절에서 보듯이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의 희생을 당하기까지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 해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할 것이고 인내함으로 영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희생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시고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육신적으로는 고난과 희생을 당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영혼육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1장 8절 말씀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 되시고 만물의 끝이 되십니다. 시종이 여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역사와 구원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절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니 담대함과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4절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늘이 아닌 장차 이루어질 큰일과 앞으로 있을 종말적 사건을 미리 말씀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세상 끝”이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 얻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고난이 임할 때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 더욱 가까이 다가온 구원을 내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사실적 가르침을 정리하면,
첫째, 종말은 분명히 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십니다.
둘째, 종말의 징조가 있을 것이며, 그 종말의 징조가 나타날 때마다, 세계는 극심한 재난과 환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습니다.
셋째,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중단없는 기도하는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방탕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술 취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1장 27~28절과 30~31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누가복음 21장 34~3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종말에 대해 재미있는 비유를 이야기했습니다.
관객이 초만원을 이룬 어느 극장 뒤쪽에서 그만 화재가 났습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재미있는 연극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극장 주인은 불난 사실을 갑자기 알릴 경우에 벌어질 큰 혼잡을 예상하고 화재가 난 사실을 차분하게 알리려고 배우들 중에 가장 인기 있는 배우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당신이 나가서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모두 질서 있게 이 극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잘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배우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무대 위에 서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 극장 뒤편에서 불이 났는데 모두 질서를 지켜 잘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관객들은 이것이 연극인 줄 알고 모두 박수를 쳐 대며 아주 재미있어했습니다.
당황한 배우가 이것은 연극이 아니라 사실이라며, 곧 불길이 번져올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관객들은 더 열심히 박수만 칩니다. 아무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극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로가 먼저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칩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종말은 우리 앞에 현실입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될 것을 굳게 믿고 소망 중에 승리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13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기도문/
주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날 그 시를 우리는 모릅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말씀 가운데서 늘 깨어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나의 삶과 사역과 인생에서 으뜸으로 여기게 하시고 주님을 사랑하기를 내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로 인해 놀라거나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일로 인해 염려하거나 걱정하거나 절망하지도 않게 하시고 주님의 선하신 섭리와 구원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소망 중에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