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08 십자가를 적용합시다
십자가를 적용합시다(출 15:22~27, p.105, 고전 1:18, 85, 91장)
먼저 본문의 줄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를 건너 수르 광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사흘 길을 걷는 동안 물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라에 도착하는데,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므로 그 이름을 ‘마라(Marah)’라고 했습니다.
백성이 마실 물이 없음으로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한 나무를 가리킵니다. 모세가 그것을 던지자 쓴 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계명에 주의하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키면, 이집트에 내린 질병 중 하나도 이스라엘에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I am the Lord, who heals you)’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엘림에 이릅니다. 거기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곳에 장막을 칩니다.
교우 여러분,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말씀을 듣고서 살아났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도 말씀의 역사입니다.
둘째, 은혜의 말씀입니다. 자격도 없는 사람이 말씀을 듣는 중에 큰 복을 받습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을 공급받는 통로입니다.
셋째, 능력의 말씀입니다. 무에서 유를 낳는 창조 사역은 순전히 능력의 말씀으로 가능했습니다. 거센 풍랑이 일던 바다를 잔잔하게 순종시킨 일도 말씀에서 되었습니다.
넷째, 진리의 말씀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불변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다섯째, 치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과 육신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비뚤어진 삶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교정시켜 주십니다.
여섯째, 신령한 말씀입니다. 신령하다는 개념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성숙시키며 정결하고 깨끗한 사람들로 드러나도록 돕는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생각해 보면 예언의 말씀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언’이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을 내어다 보고 미리 말해 준다(豫)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말씀을 맡겨 두다(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은혜로, 능력으로, 진리로, 치유로, 신령함으로, 예언으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서도 때로는 시련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22~23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바다 홍해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너무나 커서 온 백성들이 소리 높여 찬양하며 기뻐했습니다(출 15장).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생명의 위협이 되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내용은 광야 사흘 길 동안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더욱이 좌절될만한 일이 발생하였으니 물웅덩이를 발견했으나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짐작하건대 홍해의 바닷물이 흘러들어 와 농도 짙은 짠 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일화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수감자들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자살조차 감히 허용하지 않는 공간이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지옥 같은 공간 속에서도 인간이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고 삶을 포기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속에서도 생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존자 중 한 명인 빅터 플랭클은 자신의 경험담과 주변 인물의 관찰을 통해 잔혹하고 무자비한 삶의 공간에서도 인간이 사람의 의지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그가 수용소에서 터득한 삶의 방식은 오늘의 고통을 어떠한 태도로 마주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찾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적은 시련을 만나도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당면한 고통 앞에서 믿음의 끈을 놓아 버리는 연약한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현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잘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고통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공부가 있음을 일깨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섭리를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습니다(24~2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지도자 모세를 향해 원망을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하며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분석할 수만 있었으면 좋으련만 당장 분통을 표출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살필만한 자세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역시 달랐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해결을 얻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문제들을 푸는 방법과 길을 다 알고 계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합니다. 기도는 어려움을 해결합니다. 기도는 마귀의 세력을 물리칩니다.
모세는 문제를 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그가 부르짖었더니 그 부르짖음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가지 지시사항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무 가지 하나를 물속에 던졌을 때, 먹을 수 있는 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암시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나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시련과 환란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시련을 만나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우환 질고 환난 풍파를 직면하였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 말씀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에 주님의 십자가를 적용하면 넘지 못할 산이 없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이 없습니다. 해결 받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순천 동산교회(합동측)를 출석하면서 성서 신학원에 공부를 했던 부명숙 집사라는 젊은 자매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신장병으로 사경을 헤매는 남동생을 위해 자신의 콩팥을 떼어 준 장본인입니다.
까다로운 검사과정에서부터 수술대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수술 받고 난 이후 찾아온 고통까지를 소상하게 간증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비 고비마다 주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찾아와 격려해 주시지 않았다면 견딜 수 없어서 중도에 포기하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신 주님의 환상이 나타나 힘과 용기를 내도록 도와주심으로 엄청난 일을 감당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십자가를 대입시키면 거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찬송가 415장입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1.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2.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때 날 위해 고난 당하신 주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3.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 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없네 내 한량 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아 멘.
3.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을 포기치 않고 승리하는 자에게 축복이 주어집니다(26~27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청종하고 행하는 것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시험해 보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시련을 당할지라도 믿음에 굳게 서 있으면 오래 안가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고된 광야 길을 지나가야 하고 마라의 쓴 물과 같이 인생의 쓴맛을 봐야하는 순간이 찾아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치료하시고 고치십니다.
교우 여러분,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간구하십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병에서 놓여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을 저울질해 보시는 주님 앞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 불필요한 우환 질고 환난을 면케 해 주시며 더 나아가 엘림의 안식과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예비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엘림에서 장막을 치게 되었음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본심이 무엇임을 깨우쳐 줍니다(렘애 3:33).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 했습니다. 또한 시험 당하는 중에도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다. 엘림이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버티면 엘림이 나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가오는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여러 가지 문제가 등장합니다. 마땅히 머물러 쉴 곳을 찾기도 쉽지 않은 행군의 나날이었습니다. 작열한 태양의 무더위와 메마른 사막의 목마름 그리고 모래 먼지와 바람, 밤의 추위가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지치고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누가 이들을 광야로 내몰았습니까? 기구한 운명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선택의 결과였습니까? 성경은 대답합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토록 힘들고 고달픈 길을 걷도록 하신 장본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유용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며 이를 적용하도록 문제와 고통이라는 상황을 테스트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를 적용하면 ①해결되고 ②극복되며 ③감내하여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의 삶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의미하게 살던 삶이 의미를 찾게 됩니다. 보람 없던 사람에게서 보람을 찾게 됩니다. 슬픔 속에 살던 사람이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미움 속에 살던 사람이 사랑하게 됩니다. 불안 속에 살던 사람이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실패 속에서 좌절되어 있던 사람이 새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므로 승리하게 됩니다. 절망에 빠졌던 사람이 소망을 갖게 됩니다. 병든 인생이 치유함을 얻습니다.
기도문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반복되는 역경과 시련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있습니다.
모세와 같은 주의 종들의 순종이 있게 하옵소서. 원망과 불평을 속히 거두게 하옵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섭리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주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주님의 십자가를 적용하여 승리하게 하옵소서. 엘림의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자로 인정받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