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6 가장 큰 계명
가장 큰 계명(막 12:28~34, p.76, 마 22:37~40, 214, 218장)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은 문자적으로는 ‘글을 필사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 관직을 의미했으나 포로기 이후 율법과 관련한 일을 하는 전문 직종이 되었습니다(스 7:11). 율법을 필사하다 차츰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했고, 신약시대에는 율법사나 율법 학자로 불렸습니다(마 22:35; 눅 7:30).
대부분 바리새파 출신으로, 오랜 시간 엄격한 훈련을 거쳐 서기관이 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랍비’라 불렸는데,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해 세세한 규칙을 만들고, 백성의 종교 및 일상생활에 율법을 적용시키면서 백성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생 되기 좋아하고 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높은 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셨습니다(막 12:38~40).
그런데 한 서기관은 예수님과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을 듣다 사두개인들이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도록 대답하시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됩니다.
여기서 '크니이까'의 '크다'는 원어로 '메가'입니다. 메가 박스, 메가 처치, 메가톤과 같이 현대어로도 잘 쓰이는 이 말은 위대한, 크나큰, 장엄한, 무거운 등의 뜻을 갖습니다. 그리고 '계명'이란 원어 '엔토레'는 안에 라는 '엔'’과 끝이라는 '티로스'가 합해진 낱말이니 뜻은 '결론적으로 중요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서기관(율법사)들은 계명을 크고 작은, 곧 중요하거나 사소한 법들로 구별했습니다. 율법 중에는 613(십계명 글자의 수) 종류의 계명이 있다고 보고 그중에 248(사람 몸의 지체 수)개는 ‘~하라’는 긍정적인 계명으로, 365(일 년의 날 수)개는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계명으로 분류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 계명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시고, 그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쉐마’라는 신앙 신조(신 6:4~9; 11:13~21)가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의 히브리어 첫 단어 ‘쉐마(들으라)’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쉐마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암송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이 든 작은 상자(테필린)를 팔이나 이마에 착용해 일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쉐마 첫 부분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를 인용하십니다. 이는 십계명 제1계명의 중심이며 신앙의 대전제인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율법에 열심 있는 서기관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율법의 연장선에서 완성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다하다’(헬, 홀로스)라는 말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닌, 전폭적이고 전 의지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전인격과 모든 정성과 모든 능력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하여’는 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다하여’는 생명을 걸고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뜻을 다하여’는 의지적인 노력과 함께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힘을 다하여‘는 우리의 모든 동반하여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 어떤 일을 의무적으로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헌금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랑함 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헌금하고 예배하고 순종하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하는 것이 마냥 기쁘고 즐겁습니다.
사업 관계상 주말 부부로 떨어져서 지내는 어느 60대가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전화로 인사를 나눕니다. 부인이 하는 말이 ‘지금 당신 어디 있어요?’라고 묻습니다. 남편이 대답합니다. ‘어디는 어디, 당신 마음 안에 있지.’ 바로 이런 관계가 전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 21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되고 주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살아가는 관계가 성립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이웃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서기관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두 번째 계명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두 번째 계명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계명입니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나에게 쏟는 정성만큼 다른 사람에게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둘째 계명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자기 사랑은 나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 사랑의 실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일서 4장 20~21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웃 사랑은 구약 성경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레위기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살던 거류민을 가리킵니다(레 19:33~34).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그리하면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 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 주지 않을 수 없다(출 22:20~26).”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자의 참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시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자비를 베풀어야 함을 교훈하셨습니다(눅 10:25~37).
마태복음 25장 40절과 45절 말씀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로마서 13장 8~10절 말씀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본문 33절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서기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대답합니다. 서기관의 지혜 있는 대답에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32~34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먼저 나의 감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두운 감정,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고 밝은 감정, 긍정적인 감정을 살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감정의 치유라고 말합니다.
감정의 치유는 어두운 감정이라 할지라도 억압하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어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좋지 않는 감정이라 해서 마음 안으로 붙들어 놓기만 하면 무서운 시한폭탄이 되어 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욱한 성격이 여기에서 비롯된 감이 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라오면, 나의 감정을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감정의 메시지를 차분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 자신도 한숨을 돌리는 여유가 생기고 다른 사람도 행실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관계가 극단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개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슬픔, 미움, 불안, 원망, 불평, 외로움, 두려움, 근심, 걱정 등의 감정들을 승화시켜 발산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머리나 지성으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감성을 드러내어 아뢰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외로움에 눈물이 납니다. 나의 감정을 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소서. 슬픔을 대신하여 기쁨을, 두려움 대신에 평안을, 외로움 대신에 만족함으로 회복시켜 주소서.’
감정을 털어놓는 기도를 드림으로 어둡고 부정적인 것들이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밝고 긍정적인 감정이 살아납니다. 기쁨, 즐거움, 감사, 사랑, 평안, 만족함의 감정들이 우리의 심령에서 솟아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할 때도, 그 사람이 처한 상태를 감성적으로 느끼면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끌어안고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과 두려움과 불안과 미움의 감정들을 북받쳐 올라오는 심정으로 아뢰게 될 때, 놀라운 응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세 단계를 거쳐야 성숙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첫 단계는 받는 단계입니다. 부모님을 통하여 사랑을 받고 양육을 받고 은혜를 받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소유하는 단계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물질도 얻고 지식도 얻고 행복도 얻고 벌어들이는 단계, 전부 자기의 주머니로 채우는 단계입니다. 마음도 건강도 행복도 물질도 명예도 지위도 채우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받은 것을 주는 단계입니다. 이 땅을 떠날 때가 되면 주는 과정이 마지막 그 열매를 맺는 단계입니다.
식물도 자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식물도 곡식이 땅에 심겨져서 여름에 무성하게 자라나고 가을이 되면 열매가 맺어져서 자기를 심어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의 법칙입니다.
알래스카에 가면 연어가 있습니다. 작은 연어가 바다로 들어가서 장성하여 자란 다음에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길러준 곳으로 돌아옵니다. 수많은 연어들이 돌아와 자기 낳은 곳에서 다시 알을 낳고는 그 속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태어난 새끼들이 죽은 어미를 뜯어먹고 영양분을 섭취하고 자라나서 또 바다로 갔다가 또 다시 돌아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 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결론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일뿐만 아니라 모든 계명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자신 안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태복음 22:35~40절 말씀입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기도문/
하나님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날마다 친밀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긍휼을 이웃에게 전하며 영혼 구원의 기회로 삼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