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2 우상숭배를 용납한 교회
우상숭배를 용납한 교회
(계 2:18-29, p.400, 계 22:10~12, 407, 397장)
두아디라는 상공업(구리 세공, 피혁 가공, 염색, 양모 방적)이 발달했고 상업지역이라서 돈이 많았으며, 우상숭배로 인해 퇴폐적이었으며, 죄악과 타락으로 가득 찬 어둠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폴로(태양신)와 아데미(달의 여신) 신전이 있을 정도로 우상숭배가 극심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처럼 세속적이고, 퇴폐적인 도시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행 16:14~15).
주님께서는 이 같은 환경 가운데 세워진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18절에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눈이 불꽃 같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또 ‘발이 빛난 주석 같다’고 하는 것은 다스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능력과 권세가 으뜸이신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서 ‘사업(ἔργα)’은 비즈니스가 아닌, 행위를 뜻합니다.
사랑과 믿음은 삶의 내적 동기에 해당되고, 섬김과 인내는 삶의 외적 열매에 해당됩니다. 서로 모두 관계가 있지만, 사랑은 섬김과믿음은 인내와 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서로를 섬겼고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고사성어 중에 ‘용두사미’ ‘작심삼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작은 그럴듯하다가도 뒤로 갈수록 시들어 버리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해이해지기 쉬운 마음가짐을 일깨워서 모든 일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보더라도 젊은 날에 고생이 컸을지라도 노년에 행복하다면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젊은 날에 잘 나가다가 노년에 곤란을 당한다면 이것은 마음 아픈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인격과 사역이 날이 갈수록 향상되고 성숙해져 가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처음보다 나중이 더 나은 교회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 왕은 처음이 좋았지만 나중이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성품, 집안, 실력, 외모까지도 출중했습니다. 그러나 출발은 좋았는데 나중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경우엔 교만과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가롯 유다도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 그는 성실했습니다. 그러기에 회계를 맡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가 주님을 팔았습니다. 물질 때문이었습니다. 탐욕의 마음이 그를 넘어지게 했습니다.
반면 요셉은 처음은 좋지 않았으나 나중이 좋았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왕 되심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라 선정을 베풀며 기근과 가난에서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다윗은 목동에 불과한 자리에서 한 나라의 왕이 되고 통일 왕국을 이루며 메시야 왕국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2. 영육 간에 순결함을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게 치명적인 한가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칭 선지자’란 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거짓 선지자’를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거짓으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자입니다.
이런 거짓 선지자들은 교회 역사상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진정한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공격하기까지 합니다. 이 같은 거짓 선지자가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을 꾀어 음행을 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세벨은 아합왕을 사주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숭배를 전파한 장본인이었습니다(왕상 16:31~).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영육 간에 부패케 하는 이세벨의 교훈을 가르치며 따르는 사람들이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육간에 순결한 교회, 거룩성을 잃지 않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순결’이 그렇게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육 간에 순결을 요구하십니다. 순결이 물질과 쾌락이라는 이름 앞에 쾌쾌묵은 윤리로 이해되는 세태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영육 간에 순결함을 지켜서 거룩한 교회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영육 간에 순결을 더럽히는 현대인의 우상으로는 지식의 우상, 권력의 우상, 물질의 우상, 자아의 우상 등을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순결은 음란한 성생활에 빠져들지 않음으로, 영적 순결이란 우상 숭배적 행위에서 벗어나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상의 개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상이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대신해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당신의 마음이 매달리고 있는, 의지하는 무엇이든지 바로 그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마음의 신뢰와 믿음이 하나님도 만들고 우상도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우상을 파악 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3. 주님께서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21~23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볼지어다’ 로 번역된 감탄사(ἰδοὺ)에 이어진 경고의 내용은 엄중했습니다. 먼저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는 침상에 던져질 것을 전하셨습니다. 이는 곧 약해지고 병들어 곧 죽음을 앞두게 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녀와 더불어 간음하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회개하지 않으면 이라는 조건을 붙이시고는 회개하지 않는다면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지고 그의 자녀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미혹에 빠진 공동체가 속히 회개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용납하고 있는 죄악의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자의로 짓는 죄입니다. 내가 스스로 동기가 되어서, 내 마음에 의해서 짓는 죄입니다.
②죄짓게 되는 죄입니다. 한번 죄를 지었기에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다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가 되는 죄입니다.
③죄짓게 하는 죄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게 만드는 죄입니다. 죄의 원인제공입니다. 상처받게 하고 시험들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죄입니다.
④정당화 내지 합법화하는 죄가 있습니다. 내 입장이 되면 어쩔 수 없다. 내 처지가 되어 봐라. 이런 죄일수록 나로 하여금 회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신앙 생활의 발전이나 개선이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끊임없는 자기 변명에 옹색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탈무드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만이 잘되고 승리하는 지름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릭(Paul Tillich)의 말대로, “존재에의 용기 Courge to be”가 필요합니다. 옹색하고 초라하게 변명하는 대신에 회개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한 세 가지 개념으로 정의됩니다. ①아샴인데, 죄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입니다.
②슈브인데, 죄로부터 돌이킨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③메타노에오라는 신약적인 용어인데, 지금까지 해오던 습성을 완전히 버리고 무조건 항복하며 새로운 주인, 새로운 주권을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잘못을 고칠 뿐만 아니라, 과감하게 새 생활을 시작하라는 적극적인 뜻입니다.
4. 권면과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24~29절 말씀입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본문에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는 부정적으로 쓰였습니다. 영육 간에 더럽혀진 사람들에게 이에 상응하는 징계를 내리시고 채찍을 드신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심을 소중하게 지켜 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축복과 상급에 대한 약속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십니다. 통치권과 심판권을 의미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천하를 심판하시는 주님 곁에 앉은 배심원의 자리를 상급으로 베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2) 새벽 별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새벽 별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서 크게 3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오늘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칭찬이 녹아들어 있는지,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많아지고 있는지, 아니면 적어지고 있는지를 헤아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향상되고 진보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처음보다 나중 형편이 더 나은 삶과 신앙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우상숭배를 배격하여 영적 순결을 지키는 일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함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결함과 거룩함을 통해 주님과 동행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과 권세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우리의 행위를 따라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 땅에서 남겼던 고귀한 삶의 발자취들은 낱낱이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입니다.
결론의 말씀입니다. 죄에 관대해지면 그만큼 우리 삶은 편해질 수 있습니다. 더 성공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교회에 헌금도 더 많이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봉사할 기회도 더 많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직장 생활, 학교 생활, 모든 면에서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죄와 싸우지 않으니, 세상과 부딪칠 일도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영원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죄에 관대하지 않고 싸워서 생기는 지금의 불편함,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 만날 때까지 주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하나님 아버지! 두아디아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 오늘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과 책망의 내용을 살피며, 저희 안에 칭찬받을 내용과 책망받을 내용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뿐임을 고백합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미천한 경험과 얄팍한 지식으로 가하고 감하던 저희의 오만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내면의 우상을 던져버리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는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