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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9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

덕정교회 2025. 6. 26. 16:50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데 교회

(3:1~6 p.401, 고후 13:5, 488, 353)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말씀입니다. 사데는 소아시아 서부 루디아 왕국의 수도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사데를 수비하던 성곽은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와 수리아(시리아)의 안티오커스 3세 때를 제외하고는 정복된 적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고, 로마로 가는 다섯 개의 도로가 집중되었던 곳입니다. 이처럼 사데는 안전이 담보되고, 여러 도로가 집중되고 인근의 부가 집약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보면,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를 듣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그들의 사회적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사데가 그 지역의 수도로 이름이 나 있었고, 로마로 가는 다섯 개의 도로가 지나는 지역에 걸맞게 부유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데 교회는 지역 교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외형적으로는 신앙생활을 규모 있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주변 사람들의 보기에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변의 평판과는 달리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마치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것과 같은 식물인간과 같은 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예배의 감격이 사라지고, 습관만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기서 예배의 감격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지향점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주 그럴듯한 외양은 갖고 있었으나 실상은 죽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의 영적 건강은 치명적인 수준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실천이 없는 신앙은 살았으나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겉으로 활동을 많이 하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교회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어떠한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가야 하는 것은 세상의 판단, 주변의 평판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데 교회에 처방을 내리십니다.

4절에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일이 살아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속의 가치관에 빠져 살다가 영적 순결을 잃어버리면 이것은 살았으나 죽은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은 신앙과 산 신앙의 유형을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데 교회처럼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신에 빗대어 보면, 죽은 자는 차갑고 뻣뻣합니다. 산 자라야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마찬가지로 욕망을 쫓아 살면서도 항상 불평이요 원망이며 그래서 만족과 감사를 할 줄 모르는 상태가 바로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아를 포기하고 욕망을 내려놓음으로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덧입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다는 것은 세속을 향한 우리의 욕망들, 더 갖고자 하고 더 얻고자 하고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자랑하고 보여 주려 하는 욕망에서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된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견지하려고 몸부림치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옛사람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말씀 중심, 주님 중심으로 살아보려고 심혈을 기울이는 신앙입니다.

 

어설프게 죽고 어설프게 사는 신앙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믿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안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사는 모습입니다.

 

어떤 분이 밤 중에 산행을 하다가 가파른 낭떠러지로 추락을 하게 됩니다. 엉겁결에 무언가를 붙잡는데 나무뿌리를 붙잡게 됩니다. 죽지 않고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팔에 아프고 힘이 점점 빠져갑니다. 다시 불안이 밀려옵니다. 손을 놓으면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지를 몰라 고개를 들고 위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누구 없소. 나 좀 살려 주시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여보게, 손을 놓게나, 나무뿌리 잡은 손을 놓게나.’ ‘아니 손을 놓으면 낭떠러지로 마저 추락하여 죽을 것이 뻔한데 손을 놓으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래서 다시 소리를 쳤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십니까?’ 이때 나무뿌리에서 손이 풀리면서 밑으로 떨어지는데 나는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순간 발이 땅에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매달려 있는 지점이 땅바닥에서 불과 20c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는데 말씀을 듣겠다고 했다가도 내 판단과 생각으로 이해가 안 되면 하나님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소리치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설픈 신앙자의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믿을 바에는 철저하게 순종하고 신뢰하여야 하는데, 한 손에는 나의 자아와 욕망을 붙잡고 다른 한 손에는 하나님을 붙잡는 어설픈 상태로 매달려 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독일의 한 성당 앞에 붙여진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왜 나를 원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은혜롭다고 말하면서,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영원이라고 하면서, 왜 나를 찾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의롭다고 하면서, 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왜 나와 걷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부유하다고 말하면서, 왜 내게 구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지혜라고 말하면서, 왜 내게 배우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능욕이라고 말하면서, 왜 나를 우러르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공평하다 하면서,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고귀하다고 하면서, 왜 나를 섬기지 않느냐?

너희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왜 내게 순종하지 않느냐?

그런즉 내가 너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2절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가득 채워진 것을 의미입니다. 반대로 온전하지 못한 것은 비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 보시기에 사데 교회는 빈 잔과 같았습니다. 비어있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실합니다. 이름은 그럴 듯 했지만 실속은 없습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갈급함이 없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고 높이지만 마음은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이제 죽은 신앙을 살리기 위한 처방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섯 개의 명령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명령은 깨어라입니다.

2절 말씀에 너는 일깨어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경에 일깨어라고 되어 있는데, 깨어라는 명령입니다. 그만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파가 계속되는 추운 겨울에 바깥에서 잠들면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고 잠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추운 겨울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러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잠들지 않도록 계속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잠들어 버리면 생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깨어 있지 않으면 세속이라는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고 죄가 주는 달콤한 꿈에 취해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로 계속 방치한다면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식물인간처럼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라는 명령을 그냥 가볍게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640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둘째 명령은 굳건하게 하라입니다.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굳건하게 하라는 말은 넘어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세우는 것을 말하는데 무엇을 그렇게 해야 하는지 조금 헷갈릴 수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죽음에 이르지 않고 남아 있는 것,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시기를 놓치면 남아 있던 생명마저도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회복을 위해서는 그 생명을 강하게 붙잡아 세워야 합니다. 넘어가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시켜야 합니다. 유혹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고난이 와서 부딪혀도 쓰러지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굳건하게 그 자리에 서서 세상과 맞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3~14절 말씀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셋째 명령은 회개하라입니다.

3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와 연결된 세 개의 명령어가 나옵니다. ‘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입니다. 하나씩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생각하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말씀을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데 교회는 그들이 받음으로, 그들이 들음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진리의 말씀, 사도들이 전한 그 진리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지키라.’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명령입니다. 너희가 받았고 들었던 진리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거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들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공격에 넘어가지 말고 계속해서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전해질 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지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쉽게 빼앗깁니다. 그 결과는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과도 같은 귀한 말씀을 악마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3~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회개하라.’ 진리로 자신을 살피고 돌이키라는 명령입니다. 생명을 잃은 교회가 생명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생명을 지킬 수도 없고 회복할 수도 없습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15절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고린도후서 7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결론으로 본문 5~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승리의 삶을 이어가는 성도에게는 흰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성도의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알아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반가이 맞아주신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지 않으십니까?

깨어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생명을 잃은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굳건하게 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생명을 잃은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면 생명을 잃은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누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기도문/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처럼 우리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진배없는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봅니다.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돌이키는 회개의 삶을 이어가게 해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알아주시는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