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7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2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2
(눅 15:19~30, p.122, 사 55:6~7, 273, 527장)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네 살쯤에는 ‘아버지는 전능(全能)하다’고 생각합니다. 못하는 게 없는 줄 압니다.
다섯 살이 되면 ‘아버지는 전지(全知)하다. 모르는 것이 없구나’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여덟 살이 되면 ‘다 아는 것은 아니구나. 모르는 것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답니다.
열두 살이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도 그럴 것이 옛날 사람이니까’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네 살이 되면 ‘아버지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워낙 무식하니까’라고 생각한답니다.
스무 살이 되면 ‘아, 아버지는 구제 불능이다. 너무 뒤떨어진 소리만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서른다섯이 되면 ‘아버지께 여쭈어보았으면 좋겠다’하고 아쉬워집니다.
사십 세가 되면 ‘아버지라면 이런 때에 어떻게 하셨을까. 살아계셨으면 꼭 한번 여쭈어 보겠는데...’ 아버지의 그 잔소리가 그리워집니다.
오십이 되면 ‘아버지는 훌륭했다. 나보다 훨씬 훌륭했다. 젊었을 때에 아버지의 그 소중한 지혜의 말씀을 좀 더 귀담아들어 둘 것’을 하고 뉘우치게 된다고 합니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면 ‘부모’라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부모님 중에 어머니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었고 어머니는 아들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녀의 삶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없습니다. 최근 들어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결과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자존감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정도, 일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목표 의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두 아들은 몇 가지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큰아들은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큰아들은 믿는 자들을, 둘째 아들은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큰아들은 목회자를, 둘째 아들은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집을 나간 둘째 아들만 탕자가 아니라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 큰아들도 역시 탕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동생은 몸으로 방탕했으나, 마음의 일부는 언제나 집에 있었다. 그러나 형은 몸은 집에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집 안에 있는 탕자이든지, 집을 나간 탕자이든지 둘 중 하나인 셈입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한동안 재미있게 자기 멋대로 지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마침내는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 신세가 되어 그것도 사정사정해서 돼지 농장에 머슴으로 들어가 삽니다. 하루는 비천해진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을 마음먹습니다. 그가 돌아갈 때는 ‘아들로 받아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 품꾼의 한 사람으로 써달라고 요청을 드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동네 어귀까지 달려 나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반겨줍니다.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며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게 합니다. 아들의 신분과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합니다.
우리는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하나님 없는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실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관계성 속에서 참된 자유와 행복 그리고 발전과 자기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산모와 태아의 관계처럼 필수 불가결한 만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성을 파괴하고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큰아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아버지의 일을 도와 성실하고 착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동생이 돌아온 날도 밭에서 일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거센 항의를 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녀석이 돌아오니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하다니요?’ 도무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원망과 미움과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분노를 터뜨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은 큰아들의 반응을 두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릴 때, 누구를 미워하며 싫어할 때, 너무나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 열심히 살고 신실하게 살아 온 사람일수록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큰아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으로 지내왔습니다. 한마디로 모범생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것을 어느 것 하나 축내는 것도 없고 드러나게 속을 썩인 일도 없습니다. 불순종하거나 거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의가 만들어지고 자기 기준이 세워졌습니다. 동생 같은 사람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형편없는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 주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동생에 대한 미워하는 감정을 토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큰아들은 외형으로는 반듯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으로는 전혀 아버지를 닮으려고 하지 않는 가깝고도 먼 당신이었다는 데서 탕자였습니다.
이제 탕자와 같은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가산을 탕진한 후에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동네 어귀에 나가 기다리다가 감격스럽게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너그러우십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은 풍성한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그러우십니다. 모든 것을 받아 주시는 넉넉함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마음으로 맞아주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언덕 위에 올라 매일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멸망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라 여기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아들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은 언덕 위로 올라가 기다리십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안아주시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깊은 포옹이 준비된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고 용서하시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정죄하시고 거부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한없이 넓은 가슴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다 품으시는 준비된 가슴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회복시켜 주시는 마음입니다. 병들었던 아들의 몸과 마음이 아버지의 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치료하시고 회복해주십니다. 무너진 삶의 절망을 소망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서 진정한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자기 본위로, 자기중심으로 흘러가는 탕자의 삶을 돌이킬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 그 인내, 그 믿음으로 기다려 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통회 자복의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용서와 사랑과 긍휼을 가지신 아버지의 마음 헤아리지 못하고 나의 잣대로 나의 의에 나의 착함에 빠져 아버지와 동생마저 이해해 주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큰아들의 옹졸함과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리차드 렘브란트는 자신이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장엄하고도 수려한 그림(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을 통해 인생이란 팔을 벌린 채 나를 기다리고 계시면서 영원한 품에 나를 안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낙심치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아 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평생에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 때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아 오시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어느 날 새벽잠이 깨어 일어나 예배당에 나가 기도를 하는데, 내가 아버지의 은총을 기다리는 것보다 아버지께서 나를 더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돌아와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를 느껴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군요?
아버지!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를 받아 주세요. 저를 안아 주세요. 저를 꾸짖어 주세요. 저를 일으켜주세요. 아버지, 더도 말고 덜도 아닌 아버지의 아들로 살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아들이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이나 본성이 어떠했든지 개의치 말고 주님께로 돌아가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닮은 이타적이며 무 조건적인 자기희생과 헌신을 실천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을 때, 나의 신앙도 나의 섬김도 나의 삶도 거짓이 아니라 참이 될 것입니다(고전 13:1~3). 주님으로 덧입는 변화를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누구나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사랑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상업적인 사랑, 조건부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의 유익이나 욕심을 채우려는 수단으로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나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동기나 목적으로 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요 자신의 일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인간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이고 과정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요일 4:7~8)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입니다. 사랑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크고 완전한 선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 닮은 사랑을 실천한 것만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얼마만큼이나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였는가에 따라서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면류관이 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마 22:37~40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교우 여러분! 우리의 본성 그대로가 아니라 회복되고 변화된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생의 기쁨도 넘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복을 받은 만큼, 나도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6~38).”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보여 주는 탕자의 비유에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내가 탕자인 것을 알게 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제 주님께 받은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다른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환대하며 환영하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아들로, 아가페적인 사랑의 소유자요 실천자로 열매 맺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