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요 10:9~10, p.163, 380, 440장)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살고 볼 일이다.’ 맞는 말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중에 으뜸이고 제일이며 근원입니다. 생명이 있고 난 후에야 다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생명을 잃게 된다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다면 화려한 저택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금은보화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가족인들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죽음이요 무의미요 무희망입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소중한 생명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제공되는 것일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성 상위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입니다. 생명을 주신 성부 하나님,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전달자이신 성령 하나님이 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무엇이며 풍성한 생명은 어떤 것인가를 헤아려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세 종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생명(비오스βίος)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생명을 ’비오스‘라고 하는데 영어에서 ‘바이오리듬’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말로 생체리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차원의 생명은 생체리듬을 잘 좇아 생활해야 건강합니다. 노동과 운동과 숙면과 휴식이 불규칙적이면 건강할 수 없습니다. 건강 하려면 영양 섭취, 순환, 배설 등 기본적인 섭생이 원활해야 합니다.
요즘은 다들 적게 먹을 것을 권장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많이 먹어서만 병이 난 것이 아닙니다.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순환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조금 더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키고 순환만 잘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건강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생명으로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생명(프시케ψυχή)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차원에서 생명에는 지·정·의로 이루어진 인격과 그 사람의 삶의 방식(문화적인 수준) 그리고 인간관계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성지수가 풍부할수록 정신적인 생명이 더 풍요롭고 건강합니다. 감성지수가 높으면 단풍잎을 보면서도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을 감탄하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도 저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되었으면 좋겠다며 감동을 받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그 사람의 느낌이나 사고방식은 하늘과 땅 차이가 벌어집니다. 산을 오르면서도 보통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산 등에 내가 업혀서 간다고 말을 합니다.
사고방식이 어둡고 침침한 것보다 밝은 것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훨씬 좋습니다.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삶의 방식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정신적인 건강이 크게 달라집니다. 인간관계의 패턴을 네 종류로 나눠볼 수 있는데 ①너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②너는 죽이고 나는 살겠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③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윈윈전략을 택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④내가 죽더라도 너만은 살아야 한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①②은 정신건강이 무너진 사람이라면 ③④은 정신세계가 건강하고 복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영적인 차원에서 생명(조에ζωή)을 말합니다.
생물학적 생명(육체)이나 정신적인 생명은 수명이 정해져 있는 유한한 생명이지만 영적 차원에서 생명(조에)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 생명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지음에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이 예수님 안에서 깨어나고, 우리가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소통하게 된 상태가 곧 영적 생명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인간 세계에 죄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엡 2:1~ )를 영원을 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고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며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방패를 만들어 파는 사람과 창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나란히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의 급소를 연구합니다.
그런데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급소를 보호하려는 것이 연구 목적입니다. 사람의 급소를 창으로부터 보호하여 어떻게 생명을 살리느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정반대입니다. 이 창이 급소를 어떻게 뚫고 들어갈 것인지 그 방법만 연구합니다. 어떻게 방패를 뚫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죽이는 창이 될 것이지만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마귀의 역사는 ‘죽이고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마귀는 나의 영혼을 죽이기 위해서 역사합니다. 우리를 유혹해 이단에 빠지게 하거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릇된 가치관을 갖게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파멸하게 합니다. 결국은 육체와 영혼과 인생이 망가지게 합니다. 죽이고 파멸시키는 실체가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를 가리켜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몰래 들어와 믿음과 생명을 빼앗아가고, 저주와 사망과 멸망의 길로 끌어갑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죄악의 길을 가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요 부활이요 구원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생명에 있습니다. 행복의 핵심도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해야 다른 것들이 의미가 있고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생명이 되심을 강조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되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장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11장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0장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영적인 차원에서의 생명을 가리키면서도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참 생명은 예수님을 나의 생명,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는 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하게 믿음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건전하며 영적으로 구원받은 삶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하고 풍성한 생명을 유지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①호흡입니다. 영적 호흡은 기도입니다. ②먹어야 삽니다. 영양분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③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일과 봉사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④생명의 재생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입니다. ⑤무엇보다도 예수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자아를 내려놓고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풍성하게 흘러넘쳐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풍성하다’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초과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거둬들였습니다. 그 열두 광주리는 초과분에 해당합니다. 이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초과분이 있을 때 풍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풍성한 삶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매일 초과분의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말씀을 통해 매절마다 풍성한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족함이 없는 삶입니다. 둘째는 인도받는 삶입니다. 셋째는 위기 탈출의 삶입니다. 넷째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다섯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삶입니다. 여섯째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삶입니다.
풍성한 생명, 풍성한 삶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풍성한 삶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풍성한 삶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픔, 고통, 질병이 없는 삶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가 아직 완전하진 않다 할지라도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요한일서 5:11-13).
풍성한 삶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4~25)”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둘째, 풍성한 삶은 물질적인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영적 차원의 풍성함을 우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물질적인 축복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있는 삶에 속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그 어느 쪽도 하나님 편에 섰다는 확실한 표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물질적 축복을 받았으나,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전도서 5:10-15). 바울은 자신이 처한 그 어떤 물질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족함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빌립보서 4:11-12).
셋째, 풍성한 삶은 우리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완성이 이루집니다.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고린도전서 13:12).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의심 때문에 고군분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풍성한 삶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 주님을 의지하고 사모하오니,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 정신적인 생명, 육체적인 생명이 조화롭고 강건하게 하옵소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얻게 하옵소서. 매일 매일의 삶이 초과분의 은혜가 넘치는 생활 되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생명의 삶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