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에 찾아오신 하나님
(창 32:24~31, p.50, 사 41:14~16, 361, 313장)
본문은 드라틱한 인생을 살아 온 야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 머슴살이한 끝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상상을 초월한 거부가 되어 고향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창세기 32장 10절에서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올 때 무거운 마음의 짐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에서 하고 사이가 나빴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 권을 넘겨받고 나중에는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에게 양털을 손과 목에 두르고 가서 자신이 에서라고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 일로 형 에서가 분노해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위험을 알아차리고 서둘러서 야곱을 외가집으로 피신하여 살도록 보냈습니다.
20년 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마음에 무거운 짐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정탐을 시켰습니다. 보낸 사자들이 달려와서 ‘큰일 났습니다. 주인님! 형님이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창세기 32장 6절로 7절은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라고 기록하고 합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대적하기 위해 400명이나 되는 장정을 거느리고 온다니 야곱은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들 형과 400명의 장정들이 와서 칼로 치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야곱의 각고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든 형의 마음을 얻어 볼까 싶어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 나오는 낙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등을 예물로 보냈습니다.
창세기 32장 20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 온 재산을 내주고서라도 형의 마음을 녹여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만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다 보내고 자기는 혼자 남습니다. 최악의 경우 자기 혼자라도 도망치겠다는 계산입니다.
야곱은 홀로 잠 못 이루며 한밤을 시름하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와서 싸움을 겁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에서 야곱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야곱이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져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낸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야곱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구절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 씨름의 진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싸움을 걸어오신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지독하리만큼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아 온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항복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로 세우시려는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일생을 간섭하셔서 지금까지도 함께해 주시고 드디어 그의 자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기는 성숙한 신앙 인격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의도된 사건이요 영적 체험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는 일을 도모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자기 방식, 자기 의, 자기 공로, 자기 자랑을 다 내려놓고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높이고 자랑하기를 원하실까요? 그것은 복음이 복음이 되고, 은혜가 은혜가 되며, 축복이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권사님 한 분이 헌금을 해서 예배당 출입구 바닥을 대리석으로 깔았습니다. 아들 장로님이 주일마다 예배당을 들어설 때면,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아름다운 일을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오시고 예배당을 리모델링하게 되자 대리석 바닥도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있는가? 우리 어머니가 바친 것인데,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다니 단단히 화가 나서 결국에는 목사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될 수 있겠지만 장로님의 행위에는 큰 함정이 존재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와 주님을 잘 섬겼다고 해도 나의 의나 공로나 자랑으로 남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나에게 은혜 주셔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헌금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할 뿐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를 드러내고 내세우려는 마음이 우리에게서 온전히 사라지고 오직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축복임을 고백하고 주님만 자랑하며 높여 드릴 때, 은혜가 은혜가 되고 축복이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자아가 처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의 열심과 헌신이 크며 클수록 교회 공동체에 해악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我死卽敎會生, 我生卽敎會死(내가 죽으면 교회가 살고, 내가 살면 교회가 죽습니다).”
이제 야곱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 사건을 묵상하면서, 지독한 인간의 자아가 처리되는 과정을 엿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홀로 있게 하십니다(24절).
처자식 모두를 나루터를 건너 고향 땅을 향해 가게 한 후 자신은 혼자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절망했습니다.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고독이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느끼는 허무의 감정이요 하나님께 귀의하려는 영혼의 본향에 대한 향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홀로 있게 하심은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설 때,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나 잘난 맛에 살아 왔지만 이제는 죄인에 불과한 존재요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깨닫게 됩니다.
2. 하나님과 씨름하게 하십니다(24절).
씨름했다는 것은 기도함을 가리킵니다.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였을까요? 야곱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며 이기적인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몰두했습니다.
야곱이 지난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동분서주하며 전전긍긍하여 상당한 재력과 힘을 구축하였지만 자신의 삶이 허무하고 덧없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깨우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떠난 나의 노력과 수고와 염려와 걱정이 부질없음을 백 번, 만 번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이 없이는 설 수 없음을 발견하고 주님을 붙잡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씨름한 이치입니다. 26절 하반 절에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의 살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른 것을 다 놓치고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만은 놓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씨름하듯이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집니다. 이것이 야곱이 보여 준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식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심령이 필요합니다.
3. 허벅지 관절(환도뼈)이 위골되었습니다(25절).
허벅지 관절은 몸통과 다리를 연결하는 고관절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고관절을 부러뜨린 것은 자아의 고집과 아집과 주장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는 ‘주여, 주여’ 하는데 예배당 문을 열고 나오면 ‘나여, 나여’ 하면서 자기주장, 자기 욕심,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죠.
한자에서 편할 편(便)자는 사람 인(人) 변에 고칠 경(更)를 씁니다. 뜻을 풀이해 보면, 불편한 것을 고치면 사람이 편안해진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사람을 고쳐야 편안해진다는 말도 들어있습니다. 나의 사람됨을 고쳐야 편안한 인생, 편안한 가정, 편안한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백을 들어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들어와 십자가를 바라볼 때면, 먼저는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확신을 얻습니다. 다음으로는 사탄이 달려 죽은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따라 죽은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미 벌써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죽어 지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자아가 처리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4. 이제 야곱이라는 이름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주십니다(27절).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여 불러 준 것은 인격의 변화와 운명의 변화를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에는 ‘욕심쟁이, 싸움꾼’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면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뜻을 의역하면 ‘하나님께 항복한 자,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가 됩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와 복 주심과 통치를 받는 받은 은혜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대사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삶이 곧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어떠한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까?
브라질의 성자로 불렸던 미국 선교사 멜런드 부부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선교하며 평생을 사역하는 중에 이름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처음에 멜런드 부부를 ‘백인’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자신들을 괴롭혔던 허다한 백인을 불렀던 증오에 찬 호칭이었습니다. 그 후 멜런드 부부가 의료 봉사로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며 병을 치료해 주자 그들은 ‘존경하는 백인’으로 불러 주었습니다. 10년쯤 뒤 멜런드 부부는 유창한 현지어를 구사하며 인디언의 풍습대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백인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부상 당한 인디언 소년의 발을 씻어주는 멜런드 부부의 모습을 보더니,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5. 변화된 야곱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30~32).
야곱은 얍복 나루터를 ‘브니엘’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된 야곱에게는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상쾌하게 비춰오는 새날이 왔습니다. 비록 허벅지 관절이 위골되어 다리는 절뚝거렸지만 자아가 처리된 흔적이요 훈장으로 간직한 채 새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이 은혜받고 변화되니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뀌면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도 따라서 바뀌게 됩니다. 내가 변화된 만큼 다른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 보십시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가 되자 그를 해치기 위해 4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마중을 나온 형 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야곱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죽일 작정으로 온 사람이 호위병이 되었습니다. 어깨를 어긋 맞대고 감격의 눈물로 혈육의 정을 나누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에 한 말을 들어봅니다. 창세기 33장 4절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장 12절에는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 각자는 어떠한 모습으로 여기에 와계십니까?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아픔과 슬픔이 있습니까? 고통으로 다가온 시련이 있습니까? 가정의 문제가 생겨났습니까? 나의 자아가 부서지고 주님을 뜻을 굳게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온 인류사회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 감염병 사태와 기후변화와 전쟁 등은 인간의 능력으로 쌓아 올린 바벨탑의 어리석음과 덧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때 열방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져 깨어지고 낮아져 주님께로 돌아갈 기회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 나를 살려 주옵소서, 주님 나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님께 매달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절체절명의 얍복 나루터에서 부질없고 한심스러운 자아의 몰골을 적나라하게 발견하고 회개함으로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자랑하고 주님만을 높이는 사람으로서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어두운 밤은 지나가고 밝은 새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1~13).”
기도문/
주님, 우리에게도 야곱처럼 잠 못 이루는 밤을 주시고 애절하게 하나님을 독대하는 기도의 시간을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변화되고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변화된 만큼 가족도 이웃도 환경도 바뀔 것을 믿습니다. 나의 지독한 자아를 깨뜨려 주시고 새롭게 하옵소서.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