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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 부활을 더니 믿는 사람들

덕정교회 2024. 3. 29. 15:15

부활을 더디 믿는 사람들

(20:11~16, P.183, 20:27~29, 134, 17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세력들은 후한을 염려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이중 삼중으로 지키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첫째는 큰 돌을 굴려다가 무덤 문을 막아두었습니다. 둘째는 돌을 누구도 이동하지 못하도록 인봉을 했습니다. 셋째는 군대를 시켜 지키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점을 더욱 입증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완벽하리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수록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의 역사는 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은 장사를 지낸 후 3일 동안은 날마다 무덤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첫날은 장례식이 있었고 둘째 날은 안식일이어서 가지 못하다가 셋째 날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다가 빈 무덤인 것을 보고 돌아와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다시 무덤을 찾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하는데 시신을 둘렀던 세마포 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간 뒤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남다른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전하도록 세우셨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사람이 되었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9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려 고생하던 중에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 주셔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으로 그 은혜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재정적으로 뒷바라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15:41). 빌라도 앞에서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23: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겪으시는 내내 그 자리를 지켰고, 마지막 예수님께서 임종하실 때 지켜보았습니다(15:40).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할 때 거기에 있었습니다(27:61).

그리고 안식 후 첫날(주일)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가장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도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말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떠나지 않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11).

이때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뉘었던 곳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옮겨다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울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뒤편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역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왜 우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우리 주님의 시신을 옮겼으면 어디에 두었는지 말해주면 자기가 모셔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가 그때야 예수님인 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랍오니”(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친근함과 동시에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칭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죽으시고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3-4).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제자들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의심 많던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뒤에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의심을 떨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생애를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십니다. 또 특별한 경우에는 지금도 주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찾아 오실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기독교의 복음과 진리는 부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기독교 신앙에 가져다주는 의미는 절대적입니다.

 

첫째, 우리의 현실과 이성에 갇혀 있는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불신과 절망과 슬픔을 날려 버리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의심과 슬픔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입니다.

 

둘째. 부활 신앙은 시련과 환란을 이겨내는 원동력을 제공하여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믿음 생활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현세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게 되는 일에 보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 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의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게 늘 즐겁기만 하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 생활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낼 수 있게 하는 승리와 이김과 보상의 근거와 확신을 제공하여 줍니다.

 

셋째,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완성 시킨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854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 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내세 천국에 대한 소망을 심어 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여 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죽음 이후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합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이나 슬픔이 없습니다. 계시록 214절 말씀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한 신학자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네 가지를 말한다면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일입니다. 사실 세계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사의 날짜 계산을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사용하여 A.DB.C, 즉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 연호를 씁니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표시가 되어서 온 세상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 거룩하고 경건한 표시를 몸에 지니고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십자가가 조금 화려해졌습니다. 금으로 만든 십자가도 있고 다이아몬드 십자가도 있을 만큼 아주 귀하게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입니다. 이것도 온 세상이 다 인정을 합니다. 온 세계 인류가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로 지구를 진동시키고 있는 날이 오늘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도 50,000개 이상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네 번째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일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여 오시는 사건입니다. 결국 인류사는 예수님의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큰 사건이요 관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더디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6:11, 13, 14). 그러나 믿음 없는 그들을 가상히 여기시며 끝까지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부활 신앙을 갖도록 역사하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활 신앙을 갖도록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를 위한 소망(for the future)일 뿐 아니라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늘의 소망(from the future)이자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신자에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겨줍니다.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며, 그분이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되어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고린도전서 1542b-44절 말씀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할렐루야! 아멘입니다.

 

구상 시인의 <부활의 아침>이라는 시를 낭독하며 마치겠습니다.

죽어 썩은 것 같던 매화의 옛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게 죽어도 죽지 않고 또 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 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 성취될 그 날의 온 누리를 그리며 황홀해 취해 있다.

감사하고 기쁘고 영광된 부활, 소망과 능력의 승리가 넘치는 부활의 삶이 되소서.

 

기도문

주님의 부활하심에 힘입어 우리의 믿음이 유용함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 부활의 사실과 결과를 적용하여 놀라운 세계로 나가게 하옵소서. 부활 신앙 안에서 감사와 감격과 황홀함과 놀람을 품게 하시고 우울하고 두려운 세상을 담대하게 물리치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