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됨의 축복(창 32:22-32, p.49, 신 33:29, 380, 384장)
성경에 나타난 많은 인물 중에서 야곱처럼 문제도 많고 해결책도 통쾌한 경우가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 권을 가로챈 뒤, 형 에서의 미움과 증오를 피하여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여 2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거부가 되어 고향을 찾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4명의 아내와 여러 명의 자녀들 그리고 많은 재산과 짐승들이 그 앞에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금의환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에서가 자신을 순수하게 맞이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형 에서에게 앞서 보낸 종들이 돌아와 들려 준 말은 절망의 소식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야곱을 대적하기 위해 400명이나 되는 장정을 거느리고 온다니 야곱은 답답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입니다. 실제로 에서는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습니다(창 32장 6~7절).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든 형의 마음을 얻어 볼까 싶어 재산을 내주고서라도 형의 마음을 녹여보려고 했습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 나오는 낙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등을 예물로 보냈습니다(요즘 금액으로 환산하면 3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창세기 32장 20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야곱의 마음은 놓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2,23)”라고 합니다.
야곱이 한밤을 지새우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와서 싸움을 겁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씨름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에서 야곱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십니다.
이제 한 절 한 절을 읽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고독의 시간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하나님을 만나기에 좋은 조건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외롭고 적적할 때,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요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된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만약 우리가 힘들다면, 외롭다면, 그리고 내일이 절망적이라면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을 만날 시간입니다.
교우 여러분, 저와 여려분이 삶이 허무하고 낙심이 될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슬픔과 고난이 닥칠 때에 주님 앞에 엎드러지기에 좋은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 씨름은 히브리어(아박)로 ‘격투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누군지 모르는 존재와 모든 힘을 다 쏟아가면서 필사적으로 싸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씨름은 야곱이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밝혀진 그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나를 죽여 버리려고 보낸 자객이구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에서가 보낸 자객도, 야곱을 해할 목적으로 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30절에 보면 야곱이 그를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후세에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과 천사를 교차적으로 사용했습니다(호12:3,4).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과격한 씨름을 걸어오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그의 완강한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잡는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하심입니다. 놓아야 될 자아, 붙잡아야 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홀로 있게 하신 이유요 씨름하여야 하는 내용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계획과 뜻을 가지고 우리를 코너로 몰아붙이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하신 이유와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늘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운명의 장난으로 여기고 체념하거나 자포자기를 합니다.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며 믿음마저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주님과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시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비극은 고통스러운 환경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한 데 있습니다.
기업이 도산하는 것보다 그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시험입니다. 슬픈 일을 만난 것보다 그로 인해 주님을 원망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어그러진 일보다 그로 인해 기도할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 시험입니다. 병들어 고생하는 것보다 그로 인해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시험입니다. 감정이 상한 것보다 그로 인해 은혜의 통로가 막히는 것이 시험입니다.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어려운 문제보다 그로 인해 주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시험입니다.
고난의 신비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을 대면하게 합니다. 야곱이나 욥처럼 겸손하게 하나님께 질문하는 씨름을 선택하는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은 은혜로 답하십니다.
25절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을 치매”/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입니다. 육신의 욕망을 넘어선 영혼의 갈망이 이루어진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얍복은 ‘비운다. 쏟아 붓는다’라는 뜻이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자신을 비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부인을 얻을 때도 자기가 원했던 여자가 아닌 줄 알고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7년을 일해서 원하던 여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장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생각을 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킨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중심적인 삶에 대한 질타요 책망이며 끝냄을 의미합니다. 몹시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했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기다리던 매를 맞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때로는 하나님께 매를 맞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왕 맞아야 될 매라면 빨리 맞을수록 좋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신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 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낱알 그대로의 밀을 가지고는 빵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밀을 부서뜨려서 밀가루가 되어야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쓰임 받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자아가 깨어지는 일입니다.
26절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을 붙들고 울면서 간청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지혜를 의지하고, 내 능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고, 또 재물을 의지했지만,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들겠습니다. 주여 나를 축복하소서. 그러시지 않으면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적인 욕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잡고 있던 그 손으로 이제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려 간구합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위골된 상황에서도 천사를 끈덕지게 붙들고 늘어집니다. 야곱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결코 떠나게 해서는 안 될 분이 계셨습니다. 자아의 욕망과 계획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드는 인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서 이것 저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믿음만은 놓아서는 안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를 떠난다 해도 하나님만큼은 놓쳐 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다함께 따라서 외쳐봅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나의 기업이 되어 주옵소서.’
27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성경에서 한 사람의 이름은 종종 그 사람의 인격이나 생애 그리고 운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야곱에게서 듣고 싶으신 말이 있었습니다. 야곱이란 뜻은 탈취자, 속이는 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그런 놈입니다. 빼앗고 속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난 온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면서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 아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져 주신 자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어진다는 것은 변화된 삶과 운명으로 바꿔지는 순간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주님 안에서 영적 이스라엘 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겠습니까?(신 33:29, 롬 8:31-39) 화가 변하여 복이 되고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며 지옥이 변하여 천국이 되었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절).”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을 이긴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을 이길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게 될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야곱이 변화하여 이스라엘이 되는 은혜를 입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밤을 맞은 그대들이여,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붙드시라.’
29절 “어찌하여 이름을 묻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물어 볼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뿐입니다.
30절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엎드려진 야곱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이제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은 야곱은 에서를 대면하고도 결코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환대를 받게 됩니다.
31절 “해가 돋고 절었더라”/ 밤은 갔습니다. 절망과 고통과 두려움의 밤은 갔습니다. 야곱은 자아와 고뇌의 밤을 잘 통과(pass)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밝아 왔습니다.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몸이었지만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가 변화되니 환경도 변하고 에서도 변해 주었습니다. 형 에서는 얼굴을 어긋 맞대고 부둥켜안아 맞이해 주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욱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놀라운 변화와 승리를 맛보며,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복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통(神通)하면 인통(人通)합니다. 인통(人通)하면 물통(物通)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됨의 축복입니다.
기도문/
자아 중심적인 야곱을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옵소서.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