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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8 예수님 마음으로 이식하기

덕정교회 2024. 7. 25. 16:59

예수님 마음으로 이식하기

(8:40~56, p.105, 2:5~8, 454, 455)

 

왜 그렇게 분주하게 사느냐고 물으면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노력의 결과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경우를 경험합니다. 모아 둔 것도 없고, 나이는 들고, 몸은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다가도 종종 짜증을 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산다고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좀 여유롭고 넉넉한 생활을 할 때가 올 것인가?’ 짜증이 커지면 서로 원망과 불평이 터져서 부부간에 다툼이 되고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부모님에게 상처를 받은 청소년들에게 물어보면 나는 절대로 우리 어머니,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래저래 우리 가운데는 여러 가지 한계상황을 직면하여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를 발버둥 치며 노력합니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생각을 한번 뒤집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계상황을 극복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보면 어떻겠습니까? 한계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평안을 얻고 너그러움이 자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는 영적 감각과 평안함과 여유로움과 넉넉함의 비결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영적 감각 내지 감지력이 뛰어나셨습니다.

본문 45~4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이 말씀은 에수님의  마음이 신령함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셔서 신령한 능력의 통로로 쓰임 받으심이 무엇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영적 감각이 깨어나서 주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영적 감각이란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세계와 자연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하며 이를 느끼고 사랑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공감하고 공명하고 교류하는 능력입니다.

영적 감각은 경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초 경험적세계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각입니다. 영적 감각은 모든 것(종교적인 것뿐 아니라 친구, 가족, , 관계, , 고통, 기쁨, 자연, 음악, 유행, 문화 등)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는 감각입니다.

시편 369절에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세의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의 모든 것들(萬象)에는 내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 안에만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장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흩어진 자신을 주님 안에서 하나 되도록 모아 주시고, 나의 어떤 부분도 주님을 떠나지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만을 봤던 그는 주님의 부름을 듣고 회심을 하여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느끼는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상세하게 하나님을 영적 감각의 대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빵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또 하나님은 빛도 아니다. 하나님은 옷도 아니고 집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가시적인 것들이고 개별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이다. 당신이 배고프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빵이다. 만일 당신이 목마르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물이다. 만일 당신이 어둠 속에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빛이다. 하나님은 부패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헐벗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불멸성으로 입히는 옷이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을 옷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옷을 입는다.”

 

이처럼 영적 감각은 그리스도인을 지적이거나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영적 감촉(taste and touch)을 통해 주님과 신비적이며 황홀한 사랑의 교감을 경험하게 합니다.

 

2. 예수님은 급박한 현실에서도 평안을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841~44절에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 라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간청합니다. ‘죽어가는 내 딸을 살려 주세요.’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서 그의 집을 향해 서둘러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는 길을 누군가 막아서는 일이 발생합니다.

12년을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갑자기 끼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며 자신의 병을 치유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급박한 상황인데 중간에 무슨 일이 끼어들면,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됩니다. 당황하게 됩니다. 분노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정된 모습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고 불안과 절망에 쫓기고 있는 여인을 향해 평안을 빌어주십니다.

본문 누가복음 84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자신이 평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평안을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분주함 가운데서도,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소유하셨던 그 평안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마음의 안정됨과 평안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참된 평안은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선물임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께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되어 평안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관계를 회복시켜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평안을 얻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 평안이 임합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817~18절 말씀입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그러나 반대로 의도적이 아닐지라도 주님의 뜻을 거역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골로새서 315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나니.”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여 행할 때 당황스러운 현실 앞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849절에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소망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야이로의 어린 딸은 죽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50).” 믿음과 소망을 선포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통곡하고 울부짖으며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2).”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 찬 집안으로 과감하게 들어가십니다. 죽은 송장의 손을 잡고 생명을 선포해 주십니다. “아이야 일어나라(54).”

 

주님과 우리와 관계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연출됩니다. 나는 끝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죽었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아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마저 부정하시는 주님의 긍정의 선포를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내게 닥친 어려움을 당장 해결하거나 없애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방향은 얼마든지 절망이 아닌 소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마태복음 826~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두려움과 답답함이 우리를 억누르는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소망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소망의 아이콘이 될 수 있습니다. 긍정 마인드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기적을 낳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은 주변의 비웃음 가운데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853절에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선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비난하고 조롱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난과 조소 가운데서도 주님은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손길에 역사를 맡기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죽은 아이가 아이가 살아났을 때 비난한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까지도 배려하시는 너그러운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본문 55~56절 말씀입니다.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수용하고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할수록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비난과 공격을 참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난은 비난으로, 험담은 험담으로 응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 대하여 한 박자 늦추어 반응할 수 있는 여유와 너그러움을 소유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많은 사람까지도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경험상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상하게도 너그럽고 여유를 가질수록 더 좋은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반대로 더 철저하게 하려고 애를 쓸수록 오히려 더 실수하고 결실이 부족하지만, 느긋하면 오히려 더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너그러워지십시다. 환경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너그러워지십시다.

여유와 너그러움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영적 변화와 성숙에 가까이 가게 될 것이며 주님의 사랑과 용서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맛보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이식하는 비결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조급한 마음, 분주한 마음, 쉽게 동요하고 흔들리는 마음, 용서치 못하는 마음, 원수 맺는 일을 풀지 못하는 마음, 조금도 지지 않으려는 마음, 자신을 드러내 놓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나는 마음, 분노와 미움, 불안과 두려움, 절망과 낙심, 열등감과 교만 등 치유 받아야 될 마음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합시다. 마음을 숨기지 말고 털어놓아야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된 자기 고백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워달라고 요청합시다. 예수님은 급박한 현실에서도 평안을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소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비웃음 가운데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성공과 기적 이후에도 들뜨지 않으십니다. 나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이 이식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나의 필요를 주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과 응답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구원의 주님이시요 능력의 주님이시며 응답의 주님이십니다.

 

셋째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가운데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고 훈련하며 향상시켜 가는 일에 노력을 하십시다. 노력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타고난 천성이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죽었다 깨어나도 못 고친다며 마귀를 기쁘게 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선포하고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내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문제 되는 모든 것들을 해결 받으며 현재와 미래에 변화된 삶을 살도록 성령님의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기도문

주님, 우리의 마음은 늘 평안함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분주하고 바쁘고 조급합니다. 더욱이 현실적인 난관을 만나기라도 하면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마음을 갖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의 반대나 비난을 마주하기라도 하면 너그러움은 사라지고 분노와 절망을 토로하게 됩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고백하오니 치유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시고 부드럽게 하시며 너그럽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을 이식하여 주셔서 평안과 여유로움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채워 주옵소서.

주님, 우리의 영혼이 정결하게 하시고 마음이 평안하게 하시고 육신이 건강하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우리의 생활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