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들이여!
(롬 5:1~5, p.245, 요 16:33, 272, 406장)
본문 말씀을 ‘고통’을 주제로 묵상하면서 성자 예수님의 은혜와성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을 나누려고 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고통을 겪는다는 뜻이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과 동행하는 법을 깨우치며 고통이 나 자신과 함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고통을 겪으며 괴로워하는 바로 그 사람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고통을 구원의 도구로 쓰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 자체를 구원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우회하는 길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정면으로 통과해 가는 길을 배우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 속에 삽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때 모든 사람은 고통을 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합니다. 고통을 겪더라도 조금 덜 아프게 빈도를 줄여서 받는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금 기억할 것은 고통은 하나님의 이상적인 의도는 아니지만 우리가 가장 참되고 가장 아름답고, 천국을 가장 잘 준비케 하는 데 필요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이용해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에게 아주 힘든 소식인 동시에 아주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1상).”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신실한 사역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가족 구성원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말은 긍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 얻음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행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떤 아픔과 고통에서도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깊은 고통의 골짜기에서도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옳다함을 얻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안정된 애착 관계가 형성되어 누림으로 고통마저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1:1하).”
고 이중표 목사님이 열심히 신학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하루는 이런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 종아! 너는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느뇨? 저는 신학공부를 합니다. 신학이 무엇이냐? 하나님 神, 배울 學,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신학을 배우느뇨? 신학 교수에게 배웁니다.
신학을 하나님께 배워야지 어떻게 교수에게 배우느냐? 하나님! 신학을 어떻게 하나님께 배웁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보이는 하나님께 배우라.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를 바로 알아야 하느니라. 그것이 참된 신학이니라.”
인류에게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형성을 실패한 데서 오는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과 연유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방식보다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이 잃게 된 것은 관계의 파괴였습니다. 자신과의 관계, 너와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 만물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앓고 있는 트라우마를 치유하며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인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셔야만 했을까요?
로마서 5장 6~11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도 싸우고 이웃과도 싸우고 심지어 하나님과도 싸우려고 드는 싸움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화목이나 화평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터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관계를 복원하고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안정적으로 애착을 형성하게 되며 안전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찬송가 412장입니다.
(1)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올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플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싸네
후렴: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2)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자/ 그 아무도 없으리라
(3)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남은/ 주의 큰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있어/ 내 영혼이 편히쉬네
(4)이 땅위의 험한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찬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여행 중에 어느 분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순경한테 물었습니다. “여행 중에 예배를 드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에 교회가 있습니까?” 순경이 상세하게 일러 주는 대로 가보니 정말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많이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순경을 또 만났습니다. 그 순경에게 또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이 일러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다른 교회가 많던데 하필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까?”
그 순경이 대답하길 “저는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교통정리를 하면서 예배를 드리러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데 그 교회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하심에 의한 시작, 출발 →과정, 진행 → 마침, 완성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며 누리고 나누는 삶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롬 5:2상).”
두 다리로 서면 땅에 발을 딛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발달 단계상 유아는 처음에는 기어 다닙니다. 하지만 다리가 흔들리더라도 두 발로 서는 것이 더 많은 걸음을 내딛기 위한 첫 단계입니다. 서 있을 때 감지되는 감각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몸의 무게가 말 그대로 다리와 발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안정감이 감지됩니다.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땅에 발을 딛고 서면 사람이 낼 수 있는 속도 내에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기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효율적입니다. 선다는 것은 성장하는 인간이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행위들을 하게 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람은 자기가 존재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똑바로 안정되게 서면 자신감이 생기고 몸이 편안해집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고통을 딛고 설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 아래 서 있기’란 우리가 아무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에게서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얻는 체험입니다. 이 체험은 우리가 몸으로 자각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 안도감과 행복감과 편안함과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하).”
하나님의 영광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으며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권능과 경이로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놀라고 압도되기까지 한다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권면과 훈계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화답하고 찬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요 1:14).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부에 대한 사랑과 순종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수치를 당하기까지 완전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을 때에 우리가 목격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히브리서에서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서, 성부와 성자 간의 넘치는 사랑의 역동성으로 인도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고통을 통한 평안을, 죽음을 통한 부활을, 세속의 흐름에 대한 승리를 통한 천국의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롬 5:3상).”
‘견딤’이란 역경 앞에서 계속적으로 행하는 능력 혹은 지속성 그리고 그 과정에 내재된 회복력을 가리킵니다. ‘인내’는 역경에 대응하는 좀 더 능동적인 자세를 가리킵니다.
두 단어 모두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는 길을 계속 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푹 잠기면 고통에 관한 이해마저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이용하여 우리를 소망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이때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십니다.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리의 고통이 대개 세 가지 원인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타인의 의도나 상황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우리 스스에게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셋째는 힘을 다해 주님을 따르려 노력하면서 성장 과정 중에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내를 실천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치유하시고 우리의 성품을 빚으시며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그분의 소망을, 고통을 통해 발견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하~4).”
사도 바울은 모든 고통이 인내를 낳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고통은 종점이지 소망으로 가는 경로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은 고통이 닥칠 때에 이를 헤쳐나가는 방식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사실은 불멸의 소망은 필연적으로 고통에서 탄생합니다. 따라서 고통이 없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바다에서 자라나는 김이나 다시마도 추운 겨울에 성장하고 따뜻한 여름에는 성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고통 가운데 연단을 받아 우리의 성품이 성숙해져 갑니다. 여기서 ‘연단’이라는 말은 순금처럼 모든 불순물이 정련된 금속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인격이 자라는 것과 소망이 자라는 것도 고통 가운데 연단을 받을 때입니다. ‘고통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소망이란 말은 우리의 미래를 가리킵니다. 우리 앞에 다가 올 일, 우리가 예측하는 미래를 소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망을 품는 일에 관련하여 우리를 맞서고 있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단의 한 가지 목표가 있다면 우리에게 소망을 품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입혀 주신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기도로 사단을 대적하여야 합니다(엡 6:10~ ).
결론입니다. 본문 말씀은 고통은 우리의 삶에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우리를 일시적인 소망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소망으로 이끌어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고 작은 고통을 겪어나가면서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름다움과 선을 이루어가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사랑받은 결과로 소망을 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주어진 성령님 곧 우리 마음속 공간을 차지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을 통해 우리 마음에 퍼부어진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의 소망을 형성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소망을 품게 하시는 분으로서 이 긴 인생길에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고통이 동반된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사랑과 은혜 안에서 승리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문/
사랑이 많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 세상엔 소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가슴엔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등대 삼고 그 불빛을 마음에 받아서 어두운 가운데서 빛을 찾아 나가는 인생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