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사람, 다윗
(삼하 6:12~15, p.472, 요 4:23~24, 321, 311장)
오늘 본문 말씀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지방에 머물고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내용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신 10:1~ )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 17:8~11, 히 9:4~5)와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출 16:33~34)를 넣어 두었습니다. 언약궤는 증거의 궤(출 25:21~22), 이스라엘 하나님의 궤(삼상 5:7), 주 여호와의 궤(왕상 2:26) 라고도 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약궤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했습니다(삼상 4:1~11). 그 때 이스라엘 군대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사람을 보내 언약궤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삼상 4:5). 언약궤를 단순히 수호신 정도로 생각하고 자신들 마음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녀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전투에서 3만 명의 군사가 전사하며 대패했고(삼상 4:10) 언약궤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삼상 4:11).
이스라엘로부터 언약궤를 빼앗은 블레셋 역시 그 언약궤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언약궤가 운반되어 간 블레셋 성읍마다 독한 종기의 재앙을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삼상 5:6,9).
결국 블레셋 방백(지도자)들이 모여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했고 그 언약궤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졌고 사람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언약궤를 지키도록 했습니다(삼상 7:1).
그로부터 70여 년이 흘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왕권이 안정되자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언약궤가 새 수레에 실려 나오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삼하 6:5).
그런데 수레를 잘 끌던 소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흔들렸습니다. 그때 옆에 있었던 웃사가 재빠르게 언약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삼하 6:7).
율법에 의하면 언약궤는 수레에 실어 운반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에 고리를 달고 거기에 막대를 끼워서 레위인 가운데 고핫 자손의 어깨에 메고 조심스럽게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민 4:15).
그런데 다윗은 사람 생각으로 새 수레를 제작하여 근사하게 언약궤를 모시고 이벤트를 하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웃사가 죽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웃사가 하나님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전을 염려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수호신이 아니고 우리가 지켜 보호해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나 웃사는 하나님의 궤를 넘어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웃사는 언약궤에 가장 가까이 있었지만 정작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 웃사 자신은 예배자가 아니라 예배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위해 무엇을 하든지 안 하든지 모든 사람은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생각할 것은 언약궤 사건은 우리가 예배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이나 판단을 따라 예배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씀하신 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았다가 죽는 사건 때문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석 달 후에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다윗 왕이 기쁨이 충만하여, 감사하며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췄습니다(삼하 6:14).
우리는 다윗의 모습에서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다윗은 왕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충만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성공적으로 언약궤를 옮겼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했습니다.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모든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 덩이씩) 자기 가족에게 축복하러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삼하 6:19).
사울의 딸이면서 다윗의 아내가 된 미갈은 실패한 예배자였습니다. 그가 다윗을 맞이하는 태도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읽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삼하 6:16).”
미갈은 다윗 왕이 채신머리없이 함부로 뛰놀며 춤을 추는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본문 20절을 읽겠습니다. “ … 오늘은 이스라엘의 왕이 체면을 잃었군요. 당신은 당신 신하들의 여종이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었어요. 당신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몸을 드러내는 바보 같았어요(삼하 6:20, 쉬운 성경).”
미갈은 이렇게 집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핀잔을 주며 바보짓을 했다고 비웃었습니다. 미갈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춤춘 다윗을 비난하며 업신여긴 데는 사람의 시선만 중요하게 여겼지 하나님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서 그런 일을 했소. 여호와께서는 당신 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선택하셨소. 여호와께서는 사울의 집안사람 중에서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으셨소. 여호와께서는 나를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오. 앞으로 더 낮아져서 체면을 잃는 일이 많을지라도, 여호와 앞에서는 그렇게 되고 싶소. 그러나 당신이 말한 그 여종들은 나를 존경할 것이오(삼하 6:21~22, 쉬운 성경).”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일을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천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행동이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는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한 사람의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만 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기뻐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자리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어떤 직책이나 직분을 가졌든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예배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왕의 왕 되시는 하나님께 온 힘을 다해 온 맘 다해 최선을 다해 최고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시편 122편 1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우리도 성전에 올라오는 일을 즐겨 해야 합니다. 예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하러 오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사무엘 하 6장에만 6번의 ‘춤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춤추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평안과 감사의 마음으로 기쁘게, 흥겹게 춤추는 기분으로 다윗은 왕의 체면과 자존심과 위엄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온 맘 다해 힘을 다해 춤을 추며 찬양하고 최고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합니다. 예배당 시설이나 환경 그리고 좋은 장소 등을 만들기 위해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있어서 이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외형적인 조건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예배의 요소는 예배자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입니다.
요한복은 4장 24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
‘영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이루지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나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의 교통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순종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감동과 주관하심을 힘입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드려진 예배가 될 때, 우리에게는 말씀의 울림이 있고 감동이 있으며 영혼의 소생함과 심령의 회복과 육신의 치유가 나타납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다음으로 ‘예배는 진리로 드려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진리’란 단어는 말씀, 믿음, 순종 등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진리 좇아 참된 방식으로 질실 되게 순종함으로 예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과 교통하는 것은 주관적인 요소라면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방식대로 진리를 좇아 예배하는 것은 객관인 요소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의 교통하심과 더불어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섬기는 행위입니다. 예배자는 가장 높고 귀한 분에게 절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라는 말 자체가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뜻이 담긴 단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혼자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목회의 기술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설교하는 기술자, 예배 인도하는 기술자, 위로하는 기술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소풍 가는 차림이나 목욕탕 가는 차림, 수영장 가는 것 같은 옷으로는 오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새 옷 비싼 옷을 입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단정하게 입고 오면 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지키는 것, 예배 순서 순서에 적극 참여하는 것, 정성된 헌금을 드리는 것,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무슨 말씀을 내게 주실지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이후 예배는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요 4:23).
요한복음 4장 23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찾는다’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에서 드려지는 우리의 예배가 엉터리로 드려질 수 있음에 대한 경계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예배 자들을 향해 응답하시며 복을 주시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이라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배가 살아야 인생이 삽니다. 다윗이 힘을 다해 춤추던 것처럼 “힘을 다함”이 필요합니다(삼하 6:14).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십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해” 춤을 추었던 다윗과 같이 예배에 성공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문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거룩한 주일, 예배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예배의 사명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