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갱생(更生)의 길
(대상 21:7~8, p.641, 고후 7:10, 364, 361장)
먼저 본문 역대상 21장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1) 다윗은 말년에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합니다(1절).
2) 인구조사를 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의 군대와 힘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려는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3절).
3)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악하게(괘씸하게) 여기셨습니다(7절). 다윗은 그 죄값으로 백성 7만 명을 전염병으로 잃어야 했습니다(14절).
4 다윗은 뉘우치고 회개하여 오르난(아라우라) 타작마당(모리아 산)에서 제사를 드림으로 재앙을 멈추게 하고 신앙을 새롭게 합니다(26~27절).
이제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1. 믿음 생활에서 숫자나 크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탄의 충동이요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성도의 수, 재정의 크기, 교회의 규모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숫자나 크기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매이기 시작하면,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됩니다.
2. 다윗이 인구조사를 명령한 것은 사단의 충동(감동)을 받아서 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동이 온다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감정 자체를 신뢰하지 말고 나의 감정이나 감동이 성령 하나님의 지배하심과 지도하에서 이루어지기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라면 무조건 순종함으로 응답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통로요 도구로 쓰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4절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3.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이것이 나의 욕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분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깨어있는 삶이란 곧 기도하는 삶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주신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주심이 함께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때, 사단의 시험도 분별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한 연고로 주님을 따르는 데 실패합니다. 하나같이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무시무시한 홍수 심판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장 1절 하반부에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를 살면서도 타락한 시대적 흐름에 동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과 믿음을 지키며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이 매우 중요하고 인상적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과 노아는 코드가 맞았다는 뜻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어 내가 원하는 방송을 청취하는 것처럼 영적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추어서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민감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 다윗의 경우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즉위할 때까지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20년 세월이 흘러가면서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갈 때, 마음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신앙심이 희미해져 갔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나 부요하고 형통할 때도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대상을 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이 자신의 군대와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함을 보시고 이를 악하게(괘씸하게)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5.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에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하 요압과 선지자 갓을 통해서 회개를 권면 받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제사를 주님께 드림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은혜의 길을 다시 찾게 됩니다.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헌신을 결단하는 제사입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하나님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머리에서 발 끝까지 몽땅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불화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며 서로를 용납하고 환영하는 제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닫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좋지만 넘어져도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일 1장 9~10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80이 넘으신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열일곱 살에 시집을 갔는데 얼마 안되어 남편은 만주로 징용을 가고 친정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쌍둥이를 출산하였습니다. 당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나무껍질도 벗겨 먹던 시절입니다. 친정 식구가 아홉이나 되다 보니 날이 가고 달이 지나면서 다 고개를 돌리더랍니다.
결국 고의로 한 아이에게 젖을 주지 않아 죽였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죄 짐을 평생 지고 살았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권사가 되고서도 하나님 앞에 가면 이 죄를 어떻게 하나 그래서 기쁨이 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강사 목사님을 만나 상담을 했습니다. 권사님의 이야기를 다 들은 목사님이 선포하듯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식 죽인 어미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식 죽인 어미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죽인 어미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권사님은 그날로부터 죄사함의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말했습니다. ‘권사님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권사님은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오랫동안 내려가지 않던 채증이 풀어지듯이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었습니다.
끝으로 회개와 갱생의 의미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신 10:16)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둘째,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 데서 생깁니다. 죄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회개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가리켜서 회개를 가져오는 동기가 된다고 말합니다(고후 7:10). 따라서 죄를 무서워하고 미워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셋째,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두 부분으로 성립됩니다. 여기서 ‘육을 죽인다’는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엡 4:22)”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나의 의지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육신 중심한 삶이 소멸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 생활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힘이 소멸되고, 부패한 본성은 더 이상 활기를 띨 수 없게 됩니다(롬 6:5-6). 반면에 영이 살아 숨 쉬며 기쁨과 감사와 희열과 자유를 구가합니다.
어린 시절 마을에 솔개(독수리의 한 종류)가 나타나면 어른들은 서둘러 마당의 닭들을 우리에 몰아 놓으셨습니다. 드높은 가을 하늘을 유유히 비행하는 솔개는 그렇게 고요 속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한동안 큰 원을 그리며 마을 위에 머무르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런 솔개는 하늘의 제왕이자 스스로 극한의 고통을 견디어 환골탈태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솔개는 조류 중에서 오래 사는 편입니다. 70년을 사니 사람만큼이나 그 수명이 깁니다. 하지만 40년쯤 되었을 때 절체절명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발톱은 두텁게 노화되어 사냥감을 잡아챌 수 없고, 부리는 늘어지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됩니다. 또한 깃털은 너무 짙고 무거워져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힘겹고 사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 솔개는 자연도태를 당하거나, 아니면 갱생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가장 높은 산에 올라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바위에 부리를 내리쳐서 부스러뜨리는 처절한 고통을 감수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면 두텁게 노화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내고, 다시 새로워진 부리와 발톱으로 무거워진 날개의 깃털을 하나씩 뽑아냅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면 솔개는 날카로운 부리와 날렵한 발톱, 가벼운 깃털로 세차게 하늘을 날아올라 30년을 더 살 수 있게 됩니다.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몇 번은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돌아갈 수 없고 회피해서는 안 되는 직면의 순간입니다. 삶의 수준은 여기서 결정됩니다.
로마서 7장 19~25절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솔개가 부리를 찧고, 발톱을 갈고, 깃털을 뽑는 고통의 과정을 우리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만들어내고 관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로 인하여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처절한 회개로 갱생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주님, 우리의 시야가 항상 주님께로 향하기 원합니다. 나의 가진 것, 나의 소유에 기대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앙망하는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넘어지고 실족하였을 때라도 다시 일어나 회개함으로 진정으로 성화에 이르는 신앙을 소유하기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