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이 답이다- 자비(갈 5:22~24, p.308, 시 103:8, 395, 405장)
‘자비’는 원어(헬라어)로 ‘크레스토테스’(κρεστοτες)라는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뜻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구약성경(히브리어)의 ‘헤세드’와 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자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온유함’ 혹은 ‘관대함’(인자함)으로 번역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편하게 해주려는 친절함(상냥함)을 의미합니다.
최근 번역된 다양한 한글 성경에는 ‘친절’로 번역하여 나오기도 합니다.
‘자비’(慈-사랑 자, 悲-슬플 비)라는 말은 불교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깊은 동정심(同情心),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긍휼’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긍휼 역시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상대의 아픔이나 슬픔을 제거하여 기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친절이자 자비입니다.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가 맺고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으로, 내 성품으로, 내 노력으로 맺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는 열매입니다.
자비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먼저 그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시편 103편에서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라 찬양합니다.
로마서에서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말씀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인자하심’이 바로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인자나 긍휼이나 자비는 서로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해서 벌을 주지 않고 참으시는 데서, 더 적극적으로는 그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인생들이 망하지 않고 여전히 목숨 붙이고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런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찬양을 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대하20:21).”
하나님의 친절과 자비는 매우 보편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기 때문입니다(눅 6:35). 하나님의 친절 속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친절의 최고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인간 안에도 이런 자비의 마음이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비심은 선한 삶의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친절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친절한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합니다. 같은 물건이면 친절한 사람에게서 사고 싶고, 묻고 싶은 것 부탁하고 싶은 것도 친절한 사람에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친절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사소하지만 친절한 미소, 친절한 눈길, 친절한 말, 친절한 행동을 오래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옳고 그름보다는 친절을 택하는 편이 좋습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보다는 사려 깊은 친절이 훨씬 위력이 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똑똑하기보다는 친절한 편이 더 낫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합니다.
1. 친절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민감함에서 시작합니다.
친절은 언제나 주변에 대한 민감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2:4)”고 했습니다.
여기서 ‘돌아보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상처에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하라 뜻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만 민감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는 분투하면서도 손해가 되거나 싫은 일은 철저히 외면합니다. 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민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도 민감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눈과 귀를 열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형편을 보고, 그들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친절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2. 참된 친절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베푸는 것입니다.
나와 친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고, 그런 사람에게 더 베풀고, 그런 사람과 가까이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경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친절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친절의 대헌장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자비하심이란 ①사람을 가리지 않는 친절 ②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특징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기회 있는 대로 필요한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맛있기로 소문난 제과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을 한 걸인이 찾아와 빵을 주문했습니다. 가게 종업원은 빵을 포장하고도 건네주기를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가게 주인이 달려와 정중한 자세로 빵을 직접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내 빵값을 치렀습니다. 주인은 공손히 돈을 받으며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며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그가 돌아간 뒤 의아해하는 종업원에게 주인이 말했습니다. ‘평소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은 모두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지. 그들이 우리 가게를 찾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세. 그러나 아까 그 손님이 우리 빵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며 돈을 모았을지를 생각해보게. 그러면 그가 얼마나 특별한 손님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일세.’
이후 거지에 대한 주인의 친절한 태도는 미담이 되어 빠르게 전해졌고, 그 제과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교회 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친소’(親疎)를 따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끼리끼리지만 신앙은 그것을 넘어섭니다. 오히려 서먹하고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야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원수에게까지 친절의 손을 뻗칠 수가 있습니다.
3. 희생은 친절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희생이 없이 이루어진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기엔 반드시 희생이 있고, 의미 있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친절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사마리아인의 희생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험한 산길이라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곳입니다. 언제 강도들이 다시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이 사람을 도운 것입니다. 거기에다 여행에 필요한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쏟아붓고, 낙타에 그를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와서 그를 돌봐 주었습니다. 다음 날 자신의 여비까지 다 털어서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의 안위를 부탁하였고, 게다가 추가경비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34~35).
우린 여기서 자신과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한 아낌없는 희생이 그의 친절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특히 35절에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는 말씀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주막은 교회입니다. 여기에 교회에 대한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나옵니다. 그것은 교회가 주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야 하고(“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라(“부비가 더 들면”)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내가 돌아올 때”)과 그 수고를 반드시 갚아주시겠다(“갚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친절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바로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종할 때 우리 안에서는 저절로 자비의 열매가 맺혀져 갑니다. 마치 우리 안에 성령이라는 자비의 씨앗이 뿌려진 것과 같습니다. 자라게 하는 힘은 씨앗 자체 안에 있는 생명력에 있습니다. 가만 놔두면 저절로 자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밭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 뿌려졌을지라도 우리 마음 밭에 따라 그 열매의 풍성함은 달라집니다. 성령의 자비하심이 우리 마음 판에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 밭이 옥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밭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길가 밭, 돌짝 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과 같다 할 것입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길가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입니다. 그래서 땅이 단단해져 있습니다. 씨가 이곳에 떨어졌지만 단단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사이에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립니다. 우리 마음은 선입관들로 인해 단단해져 있습니다. 예부터 내려온 전통, 자기의 경험, 자기 생각들로 인해 아주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져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런 편견들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의 은혜가 내려도 다 튕겨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돌짝 밭에 뿌려진 씨는 처음에는 보통 땅에서처럼 자랍니다. 그러나 흙이 얇기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자 타거나 마르고 맙니다. 뿌리 없는 신앙입니다. 돌짝 밭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바위처럼 단단한 상처들을 의미합니다. 분노와 상처의 바위 덩어리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릅니다. 겉으로는 신사 같아 보이고 대단한 신앙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바위 덩어리들이 차지하고 있어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성품이 도무지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이 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주는 참된 기쁨과 생명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어떤 때는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위를 깨뜨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고 했습니다.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에는 잘 자라지만 곧 가시떨기에게 추월을 당하고 맙니다. 모든 잡초들이 그렇듯이 가시떨기는 생명력이 더 강합니다. 양분을 다 빨아 먹습니다. 위로는 햇볕을 막기에 힘차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가시떨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마 13:22). 그것은 일락 곧 세상에 대한 즐거움입니다(눅 8:14). 염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관심이 딴 곳에 있으니 자비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맺더라도 아주 초라한 열매를 맺고 맙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마음 밭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비의 마음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비의 열매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은 우리 마음 밭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자신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이롭게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서 재판관 포셔는 잔인한 장사꾼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호소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자비의 본질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땅위로 내리는 부드러운 비와 같습니다. 이중의 축복인데 베푸는 사람과 받는 이의 축복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자나 베품을 받는 자 모두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자 성어에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선을 베푼 사람에게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삼하 22:26~27).”
기도문
주님, 우리의 마음과 행위에서 가혹함이나 난폭함이나 쓰라림을 추방하게 주시고 은혜스러움만이 남게 하옵소서.
주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심과 같은 자비와 친절과 긍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