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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4 성품이 답이다- 온유

덕정교회 2025. 4. 30. 08:07

성품이 답이다- 온유

(5:22~24, p.308, 11:28~30, 529, 543)

 

오늘은 어린이 어버이 주일인데 계속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덕정교회 온 권속들이 온유한 성품을 지닌 부모와 자녀들로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온유(溫柔)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아니고는 수용하기가 힘든 덕목입니다. 힘을 정의로, 굽히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세상에서 온유는 약자의 변명 정도로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는 온유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하였고,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라고 혹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초인사상’(Übermensch)을 강조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은 강하고 힘이 넘치는 것이고, 나약하고 미약한 것은 이었습니다. 니체의 이 철학을 정치 현실에 적용한 사람이 독일의 히틀러입니다.

 

그러나 차갑고 굳은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에 생명력이 넘치는 법입니다. 생명 없는 광물질은 차고 딱딱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나무도 껍질이 두꺼워지고 딱딱해지면 죽어가는 고목이 됩니다. 부드럽고 연한 가지에서 푸른 잎이 움트며,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맺힙니다.

 

두 가지 방향의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사람과 점점 부드러워져 가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가는 방향이 딱딱한 쪽이라면 얼른 되돌려야 합니다. 더 이상 딱딱한 막대기가 되어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말입니다. 부드럽고 연한 가지에서 새싹이 나옵니다. 사회도, 나라도,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껴안을 만큼 크다는 의미입니다.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만큼 현명함입니다.

밀림을 지배하는 힘은 강한 야성에서 나오지만 문명을 이끄는 힘은 부드럽게 포용할 수 있는 모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온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뜻합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plautes)’인데, 원래 이 단어는 야생동물을 훈련 시켜서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통제된 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온유를 트레인드(trained/훈련받은, 숙달된)’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생마를 훈련 시켜서 그 엄청난 힘을 잘 조절하여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훈련된 사람을 뜻합니다. 자기 마음과 감정을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고, 그래서 용맹이나 화려한 성공보다 온유함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잠언 1632절 말씀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온유는 태어날 때 자연적으로 가지고 나오는 성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된 성품입니다.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된 모습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겸손한 마음의 태도입니다. 온유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만들어집니다. 온유는 성령님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모세, 아브라함, 요셉, 다윗은 천성적으로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훈련의 결과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 하지만 모세의 천성은 결코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왕자로 있을 때 누구보다 혈기 왕성했고, 온유한 자가 될 때까지는 광야에서 배우고 훈련하며 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운동의 기본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수영이나 배구,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골프 모두 힘을 빼야 합니다. 초보와 프로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골프 초보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골프채로 치는 데 공이 나가질 않는다고 합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 힘을 빼는데 보통 약 3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비로소 힘이 빠져서 공을 치면 멀리 나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주어야 잘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힘을 빼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 나온 이유는 힘주려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힘 빼러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의 힘, 정욕의 힘과 같은 모든 악한 힘, 나도 모르게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하는 모든 자랑의 힘을 빼러 나옵니다.

나의 모든 힘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주님의 힘이 머무르게 됩니다(고후 12:9). 이렇게 힘을 빼는 과정이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십니다(11:29).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었던 사람으로는 모세가 있습니다(12:3).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온유의 모델인 예수님과 모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26:42). 기도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길들여진 온유한 삶을 가능케 합니다.

 

온유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성품입니다. 온유는 내적인 강한 힘입니다. 온유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성품입니다. 온유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리더십입니다. 외적인 강함은 경쟁을 부추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지만, 온유함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줘 우리의 지경을 넓혀 줍니다.

 

미국의 신학자 리처드 마우는 무례한 기독교에서 온유는 그리스도인이 잃어버린 소중한 성품 중 하나라며 남을 존중하고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온유한 자는 사람들을 자신의 올바른 믿음으로 설득하거나 선교하지 않아도 그의 온유함이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온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온유함은 비겁함도 아니며 자신감의 결여도 아닙니다. 온유함은 그저 인간적인 친절함도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삶이 고난의 길이라도, 혹은 나의 뜻과는 반대되는 것이라도 가장 선한 것임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시편 3711절에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땅을 차지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합니다. ‘차지한다는 말은 다스린다.’ 혹은 정복한다는 왕적(통치적)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부동산이 생긴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전심으로 따를 때,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주님의 나라가 바로 그 사람의 유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평화롭게 누린다는 뜻입니다. 즐겁게 행복하게 평화롭게 삶을 누립니다.

주변에는 많이 가졌지만 그것을 즐겁게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불평 속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소유를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거기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그것을 즐겁게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즐거워하며 풍성하게 누립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공급에 의존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가 사라져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공급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노자(老子)의 일화(齒亡舌存)입니다. 임종을 앞둔 노자의 스승 상용(商容)이 그를 불렀습니다. 상용이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내 혀는 아직 그대로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빨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게 무슨 까닭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혀가 아직 그대로인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빨이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이 바로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빨처럼 강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워서 입술과 혀를 물어서 피를 내지만 부러지고 깨지고 빠져나가고 없어집니다. 하지만 혀처럼 바보스럽게 물리고 피가 나는 것은 남아있게 됩니다. 즉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결국은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겸손한 마음, 양보하는 마음,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하나님이 쓰실 만한 훈련된 신앙 인격입니다. 온유한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그는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분명 땅에서도 승리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중심인물인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을 풍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잘 가꾸어진 정원의 연못에 있는 물고기잡이에 내기를 걸었습니다. 제일 먼저 히틀러는 권총을 뽑아 발사했습니다. 그러나 탄환은 물고기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히틀러의 실수를 본 무솔리니는 연못에 직접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물속에서는 물고기의 동작이 사람보다 민첩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칠의 차례가 왔습니다. 처칠은 연못의 물을 퍼냈습니다. 물고기는 당연히 처칠에게 잡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어떤가? 강자였던 히틀러, 무솔리니에 대해선 사후에도 단죄의 소리가 높지만, 처칠은 국가 유공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고, 런던 피커딜리 공원에 동상이 서 있습니다.

자연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금잔디와 클로버, 어떤 것이 강할까? 잔디가 강한 것 같지만 잔디밭에 그 여린 클로버가 뿌리를 내리면 잔디밭은 변해버립니다.

부드러운 가죽과 예리한 면도칼 어떤 것이 강할까? 면도칼이 강한 것 같지만 면도칼을 세우려면 보들보들한 가죽에 문질러야 합니다. 부드러운 가죽이 강한 면도날을 마모시킵니다. 땅을 정복할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결론입니다. 온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입니다. 어떻게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첫째,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우리의 삶이 완전하고 거룩하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고 좇아가는 삶을 일평생 살아야 되는데, 그 첫걸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실 때에 성령의 열매들이 내 삶 속에 맺혀지게 됩니다.

 

둘째,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감정을 지켜야 합니다.온유한 사람은 분노를 다스리고 참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사람은 단순히 부드러운 사람을 뛰어넘어 용기 있는 사람이고, 진정한 승리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노가 죄와 연결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자칫하면 죄로 이어지고, 마귀에게 빈 틈을 보이는 허점이 되기도 합니다.

 

셋째,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교만한 사람이 없고, 반면에 성격이 강하고 거친데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 온유한 사람은 겸손하고, 겸손한 사람은 온유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유하신 동시에 겸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마태복음 1129절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우리는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항상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시라면 이러한 때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거기에 온유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기도문/

주님, 우리도 주님의 온유함을 배우게 하옵소서. 신앙의 선진들에게서도 온유함을 배우게 하옵소서. 모나고 거친 우리의 성품일지라도 주님 안에서 잘 훈련되고 길들여져서 온유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 얻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