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마 17:19~20, p.29)
구약 성경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만나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는 초라하고 연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꺼지지 않는 불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하심 안에서 보호받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우리를 두 가지 방식으로 만나 주십니다. 하나는 직면케 하십니다.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어리석음과 위선과 가식을 벗겨내 주시며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격려하십니다.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확신을 주십니다. ‘너도 할 수 있어. 나는 너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어. 힘을 내라고. 내가 너를 도와 줄게, 내가 너와 함께 해 줄거야. 세상 끝날까지 너를 돌봐 줄거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 20절 상반절에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만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하신 말씀에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제자들을 크게 격려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에는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에 대해 묵상하면서, 주님의 격려하심과 힘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처럼 아무리 작은 믿음일지라도 큰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큰 것을 선호하고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만 작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믿음 없는 큰 것보다 더 복되다는 뜻입니다.
마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분명한 신앙고백을 했을 때,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시면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이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과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 가장 작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외형적으나 형태로 보았을 때, 식물의 씨앗 중에 이렇게 작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깨알보다 훨씬 작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외형적으로는 외소하고 보잘 것이 없이 보여도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를 걸으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 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 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둘째, 겨자씨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살아있는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엡 2장 1절 이하를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산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증언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생명을 얻습니다.
요일 5장 12~13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좋지만 안 믿어도 상관없다는 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생명을 얻기 위한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이때 생명을 지닌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여기며 받는다는 것은 놀이나 게임이나 오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매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한 여인이 매번 낡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선교사님은 ‘적절하지 않은 예배 자세’라고 생각하여,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그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왜 이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합니까?”
그러자 그 부인은 ‘이 옷이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당신은 그렇게 가난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선교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이전에는 돈과 좋은 옷들과 보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권력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재산을 모두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버리면 빼앗아 간 모든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선교사는 “재산을 다시 찾아서 부유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삶의 본질이요 알맹이며 근본이고 해답이며 구원자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아무리 많은 것,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얻으면 전부를 얻는 일이요 예수님을 잃으면 전부를 잃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곳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돈을 벌면서도 거기에서 예수님을 보아야 하고 권력을 잡아도 예수님을 놓쳐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만큼 예수 믿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며,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셋째, 겨자씨 믿음은 자라는 믿음입니다.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정지 상태로 있지 않고 자란다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 13장 32절을 보면 겨자씨가 자라면 3~5미터 정도로 자라는 큰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십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본문 앞 단락에서도 변화 산상에서 베드로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여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으로 섭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는 것은 먼저는 씨앗이 싹이 나고 줄기가 올라와서 나무를 이루듯이 외형적으로 자라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가족 전체가 믿게 된 이치입니다.
또 하나 자란다는 것은 내적인 성장이나 성숙을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엡 4장 15~16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 개개인이나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세워져 갑니다.
넷째, 겨자씨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산’이란 태산 같은 문제를 말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믿음의 역사로 태산 같은 문제도 해결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많고 문제도 갖가지입니다. 가장 본질적으로는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요 사탄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이 아이를 땅에 사정없이 넘어뜨리고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게 합니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 몸이 뻣뻣해진 채 심한 경련을 일으킵니다. 귀신이 어떤 때는 물속에도 넘어지게 하고 어떤 때는 불 속에도 넘어지게 합니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살리고 싶은 일념에 귀신을 내쫓을 방도를 찾아 수년 동안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만 낭비하고 고생만 했을 뿐 아들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아이를 아홉 명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귀신을 내어 쫓아 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소리쳐 귀신을 내 보려고 했도 진땀만 났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한순간에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음이 작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조건 작은 믿음이 문제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믿음이라도 점점 성장하는 믿음이라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영적인 문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도 믿음은 해결책이 됩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충만해져 유능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돈으로 안 되고 권력으로도 안 되며 사람의 재주나 능력으로도 안 되는 일들을 영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겨자씨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쓰임을 받습니다.
마 13장에서 겨자씨가 큰 나무를 이루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력이 넘치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놀라운 혜택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30년 전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놀라운 혜택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영혼 구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곳곳에 병원과 학교가 생겼습니다. 문맹이 퇴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천민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물질적으로도 잘 살고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요 복음이 이 땅에 들어 온 결과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나는 가진 것이 없고 믿음이 작다고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영접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생명으로 성장하고 자라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스가랴 4장 6~7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큰 산= 해결할 문제를, 스룹바벨= 자신의 이름을 넣어 믿음으로 외쳐 봅시다.)
기도문/
주님,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믿음이 작다고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영접하여 예수님을 닮은 생명으로 성장하고 자라는 믿음 되게 하옵소서. 그 믿음의 결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