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호 11:1~8, p.1266, 380, 405장)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삶을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셋으로 구분됩니다. 1~4절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요 5~7절은 그 사랑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입니다. 8~12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다시 사랑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요약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봅시다. 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마귀의 속박 아래서 이끌어 내시고 자녀 삼아 주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들의 과거를 돌이켜 봅시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내셨습니까? 죄의 길을 거닐고 있을 때, 낙심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병고로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불러내셨습니다. 그것은 곧 나의 출애굽인 셈입니다. 은총의 과거입니다. 이 은총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천국도, 영생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 불러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송 『세상에서 방황할 때』 가사 말입니다.
1.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맘 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2.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받지 못했다오.
3.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드으셨네 못자국 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 만지셨네.
4. 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은 그들이 강하거나 잘난 것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인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방편으로 훈련 시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송입니다.
1.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2. 날마다 주님 내 곁에 계셔 자비로 날 감싸 주시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힘 주시네 위로함 주네
어린 나를 품에 앉으시사 항상 평안함 주시도다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동안 살피신다 약속하셨네
3.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 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에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흘러가는 순간순간 마다 주님 약속 새겨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지만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2절을 보면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이유 없는 반항으로 하나님을 배신하였다고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울 때는 회개도 하고 기도도 하고 충성 헌신 봉사도 하지만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스라엘을 낳고 걸음마도 가르치며 사랑으로 키우셨는데 이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2절을 계속 보면 우상을 숭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섬겼습니다. 바알은 물질의 신입니다.
우리도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봅시다. 하나님보다 더 먼저이고 하나님보다 더 우선이었던 것이 없었는지 말입니다.
4절을 보십시다.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라고 했습니다. 탈무드에 이야기입니다. 아기를 엄마의 탯줄에서 끊는 순간 천사는 엄마와 아기 사이에 사랑의 줄을 매달아 놓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아주 멀리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랑의 올가미를 씌워서 인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육체의 가시로 사랑의 줄을 만들어 묶어 두심으로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이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조금만 나아지면 교만하고 으스대고 곁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나만의 아픔과 고통과 문제를 허락하셔서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를 묶어 놓게 하십니다.
찬송가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가사 말입니다.
1.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보혈로 정케하사 받아 주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2. 괴론 세상 지날 때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주를 믿고 나가면 나의 길을 잃지 않겠네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3. 세상 살아 갈 때에 주를 더욱 사랑합니다 밝고 빛난 천국에 나의 영혼 들어 가겠네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8절을 다시 보면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나님의 호소는 절규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기에 이들을 놓을 수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불이 붙듯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하십니다. “내 속에서 돌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쌍하여 마음이 격하여지신 것(뭉클하여 걷잡기 어려운 상태)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 불붙듯 하셨기에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차마 버릴 수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행대로 하자면 천 번 만 번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의 무궁하심을 인하여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너무 잘하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 없이 살수 없어요’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늘 굉장히 새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목사님은 예수 없이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요?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은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예요 그보다 더 위대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예수님도 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나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그처럼 사랑하십니다.
9절의 ‘아니하며, 아니하리니, 아니하리라’고 3번이나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사 49:15참조).
이 말씀은 후일 포로 귀환으로 성취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시는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배로운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으니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시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랑에 붙잡히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 10:28~29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성경을 통해 조금 더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이렇게 묘사하며 간구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40: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51;1).” “저가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4,5).”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103: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4).”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145:9).”
선지자 이사야도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질문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 큰 니느웨 성을 내가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옳지 않느냐”(현대인번역)(욘4:11).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안에 있는 죄인들과 동물들까지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를 하나 선택한다면 “긍휼”이란 단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긍휼이란 단어 안에는 용서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20절)”라고 했습니다.
또 예레미야애가 3:19-23절을 보면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주의 성실이 크심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진멸되지는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멸망을 받지 아니하는 것은 그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도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사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간음 현장에 잡힌 창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사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드리는 종교적인 제사가 아니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베푼 긍휼의 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신앙과 반역의 죄로 망하게 된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1,42).”
마지막에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과 배신자 베드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또 10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자처럼 일어나셔서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하시면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흩어졌을지라도 다시금 여호와를 좇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다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긍휼이 불일듯 하셔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셨습니다. 그 모든 책임을 아들의 십자가에 돌리시고 큰소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금년 한해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은 나의 모든 허물을 덮고도 남았습니다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단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마 하는 차원이 아니라, 끝없이 반항하고 거역하고 결심하고 돌아서는 그들을, 또다시 찾아내시고 안으시고 사랑의 줄로 묶어서, 결국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긍휼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붙듯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며, 그 긍휼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일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질됨이 없이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참된 기쁨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행복자라면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베풂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사랑과 긍휼을 잃지 말았으면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한 토막 소개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기도문/
주님,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세상일에 분주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 나를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품을 거절하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주께 가오니 우리의 연약함을 고치시고 치료해주셔서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닮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