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이 답이다- 화평(갈 5:22~24, p.308, 마 5:9, 368, 410장)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얼마나 될까요? 20세기를 대표하는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는 본인의 저서 <역사의 교훈>에서 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 전쟁이 없었던 해는 268년, 7.8%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도 1945년부터 1990년까지 2,340주 동안 지구촌에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단 3주일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목사이자 평화운동가의 삶을 살았던 A. J. 무스티(Muste)(1885∼1967)는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고 말했습니다. 평화는 이런저런 방법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필수 덕목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평화와 생명의 길이셨던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이 곧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온 영혼으로 받아야 할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간은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화평의 열매는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과 일치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힘들고 고단했기에 이 ‘샬롬’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샬롬은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적극적으로 서로 믿고 기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가 화평한 것이 샬롬입니다. 또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은 육신의 샬롬이고, 근심과 두려움이 없고 마음이 평안한 것이 정신적 샬롬입니다. 이 말은 우리 말로 해석하면 화평, 평화, 평강,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화평의 종류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영적인 화평입니다. 영적인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셔서 행복한 곳 에덴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행복한 관계가 깨지고 동산에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화목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롬 5:1).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죄악의 담을 허물고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장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와 허물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원수가 되었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평화를 누릴 특권이 주어집니다. 평화가 회복될 뿐만 아니라 그 특권을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는 관계적인 평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하늘의 평화를 맛본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평화를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로 더불어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림으로 모든 이들에게 이 평화를 증거 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화평을 강조하신 성경 세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를 화목케 만들어 줍니다.
에베소서 2장 12~16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된 관계였습니다. 서로 정죄하고 심지어 서로 악수나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서 이방인과 유대인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민족과 신분의 경계를 넘어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연결시키고 나와 너 사이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화평케 하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대다수 교단들의 분열은 도무지 화합하지 못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수많은 교회의 갈등과 분열들은 어떻습니까? 회개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십자군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빼앗긴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고아와 미망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결과 오늘까지도 기독교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에 무서운 증오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던 그때 이 전쟁의 잘못을 지적하고 아군 진영뿐만 아니라 적군들에게까지 평화의 사신을 보내고 복음 전도자들을 파송하며 눈물로 기도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씨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입니다. 그는 한 시대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정서적인 내면의 평안이 있습니다(골 3:15). 마음의 평화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화평을 이룬 다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내적인 즐거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교우 여러분! 염려와 걱정은 믿음이 부족한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마음의 평강을 깨뜨리는 염려를 거절해야 합니다. 염려는 고통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염려의 늪에 빠지면 자신이 황폐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처럼 염려거리를 기도 거리로 바꾸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환경에 메이고 염려에 사로잡혀 끌려다니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지나친 욕망을 제거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나의 이기적인 감정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주어집니다. 자족할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마음의 평화가 유지됩니다.
어떤 청년이 자신이 꼭 이루고 싶은 것들을 종이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아름다움, 재물. 그리고 자신이 적은 이 목록을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을 찾아가 보여 드렸습니다. 스승은 청년이 적어 온 목록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청년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 온 것은 참으로 훌륭해. 그리고 일리가 있는 목록이라 생각하네. 그런데 자네는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의 성취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될거야.’
그러면서 이 스승은 연필로 청년이 써온 목록을 쓱 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다가 다음과 같이 썼다. ‘마음의 평화!’
청년은 나중에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부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랍비 죠수아 리브만(J. Liebman)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재물이 있고 건강이 있고 권력이 있다고 해도 화평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어느 장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좋은 환경, 풍요로운 생활 속에서도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화평이 깨진 것은 건강, 사랑, 재물, 재능, 명예 이 모두를 담는 그릇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H. Ford)는 84세의 일기로 죽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는 건강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평안한 마음인데, 그 중에 제일은 평안한 마음’이라 했습니다.
평생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헛된 일들 중에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 마음의 즐거움(전 2:24)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음의 평안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갈구하는 평화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 역시 우리의 내면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나라를 내 손 안에 넣으려고 하는 탐욕과 교만이 너와 나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돌이키게 하시고 화평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로 거듭나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평화하여 행복한 세상, 행복한 인생으로 살기 원합니다.
기도문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욥 25:2).”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주님, 우리에게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