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에 들어야 할 네 가지 말씀
(마 28:5~10, p.51, 고전 15:1~2, 540, 171장)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봐요?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린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합니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게 늘 즐겁기만 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능력과 영광 그리고 승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절 주일 새벽 시간, 두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덤 앞에 도착하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알려주었습니다.
6절부터 7절까지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여기서 천사가 들려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오라. 보라. 가라. 말하라’ 네 개의 강렬한 명령문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명령문을 문장으로 만들어 읽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 무덤으로 나오라!
둘째, 주님의 누우셨던 자리를 보라!
셋째, 사람들에게로 가라!
넷째, 부활에 대해 말하라! 입니다.
이제 천사가 들려준 부활의 메시지에 담긴 네 개의 명령문을 우리가 ‘부활절에 들어야 할 네 가지 말씀’으로 받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 무덤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주님께 나오는 데는 많은 장애물과 방해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는 시간과 장소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새벽녘 무덤을 찾아간다는 것이 매력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좀 밝아지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면 좋겠다는 말을 서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방해 요소는 빌라도 총독의 명령으로 예수님의 무덤 문은 봉해져 있었고 군인들로 24시간 지키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으니 여인들로서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방해 요소는 자신들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서는 용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힘이나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면 무슨 얼굴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갈 수가 있겠는가?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이 예수님께로 향하는 여인들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있음에도 이를 물리치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들도 내게로 나오라는 주님의 초청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누구든지 주님의 초청에 반응하기 전까지는 구원도 지식도 지혜도 자라남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행동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로 나오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쉼과 안식과 평안을 베푸십니다.
둘째, 주님의 누우셨던 자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무덤을 보아야 하고 그것이 왜, 우리에게 유익한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 무덤을 볼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희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내어 주셨으니, 그 낮아지심과 희생은 우리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둘, 우리는 주님의 무덤에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의 끔찍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은 죄값의 대가가 얼마나 무겁고 가혹한지를 깨우쳐줍니다(사 53:5).
셋, 우리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5가지 가설들이 있습니다.
①기절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다는 가설입니다.
②환상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맞지만 제자들이 극도로 슬퍼해서 예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는 가설입니다.
③쌍둥이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예수님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어서 그가 부활한 것처럼 꾸몄다는 가설입니다.
④도적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가설입니다.
⑤음모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제자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음모를 꾸몄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 무덤은 부활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넷, 우리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과 연합된 우리도 역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듯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히7:25)’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영혼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포함한 전 인격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에는 우리도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함께 영원한 천국을 얻게 되리라 믿습니다.
셋째, 사람들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덤 가까이 남아 그것이 주는 교훈을 배우는 것도 분명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무덤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 아닙니다. 무덤을 떠나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무덤가를 서성이며 거기에서 한 걸음도 옮겨 놓지 못하는 신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부족할 때입니다.
아니면 경건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분위기를 기쁨으로 가져가는 것은 어쩐지 경박한 신앙이라 여기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을 묵상하며 슬퍼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는 오해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맛보아야 될 기쁨과 승리와 영광을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토)에 예배하는 것을 주일날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이 주님의 부활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번 돌아오는 주일은 부활절과 같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과 능력과 영광과 승리를 누리며 증언하는 일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넷째, 그러므로 부활에 대해 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와서 빈 무덤을 보았다면, 그리고 가라는 명령을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만나는 이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그 소식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어떤 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려준 천사의 메시지는 한편의 설교입니다. 그것도 완벽한 설교입니다.
먼저는 선언이 나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나서 네 가지의 명령이 나옵니다. ‘오라. 보라. 가라. 전하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속이 주어집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28:7 중반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주겠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육신의 고향이자 영혼의 고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처음 만났고 그곳에서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업마저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게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 걸음아! 나 살려라. 예루살렘을 도망쳐 나와 갈릴리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 주심으로 개인적인 믿음의 회복과 치유뿐만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자들은 큰 용기와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주님을 따르며 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 신앙으로 무장된 제자들을 향해 지상 대 위임명령과 약속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지녔으면서도 부끄러워할 때도 있고 소심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증거 하는 말을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려할 때도 많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 페드로라는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페드로의 어선은 나뭇잎처럼 표류했습니다. 칠흑같은 밤, 페드로는 파도와 강풍에 맞서 몇 시간을 싸웠으나 방향과 기력을 모두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먼 곳에서 강렬한 불기둥이 솟구쳤습니다. 불기둥은 곧 육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페드로는 사력을 다해 불기둥이 있는 곳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맞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런데 통곡한 이유가 달랐습니다. “여보, 제 실수로 우리 집에 불이 나서 세간을 몽땅 태웠어요. 이를 어떡하면 좋아요” 그 생명의 불기둥은 바로 페드로의 집에서 피어오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껴안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합니다. “여보, 고맙소. 당신이 실수로 불이 난 것이 나와 아들의 목숨을 구했소. 불기등이 없었으면 우린 모두 침몰했을 것이오. 집에 불을 내줘서 고맙소”
이 이야기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불기둥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초가삼간이 불타는 아픔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상 최대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삶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하여 위대하고도 놀라운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증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부활의 시 낭독)
목 타는 산과 들, 대지마다/ 연둣빛 풀과 나무가/ 되살아나 소생하듯/ 꽃이 피고 지는 자국마다/ 아픔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는 것이 사는 것/ 부활은 고통으로부터 승리라.
보라, 주 예수!/ 사랑의 승리자여!/ 생명의 부활이여!/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부활은 기쁨이요, 영원한 생명이라
만왕의 왕 구주 예수/ 부활하셨네/ 만왕의 왕 구주 예수/ 부활하셨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